내일시론

우크라전쟁 '사즉생' 각오로 연대?

2023-07-19 11:39:49 게재

한국인치고 '사즉생(死則生) 생즉사(生則死)'란 경구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고 목숨을 바친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1597년 9월 15일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이르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다. 그것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은 살려고 생각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그는 한산대첩에서 승리해 남해안 바닷길을 완전 장악하고도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해임돼 한양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치욕적인 백의종군 길에 올랐다. 후임 통제사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해 조선수군이 보유 중이던 160여척이 모두 불타고 병력이 궤멸된 뒤 재등용됐다. 남은 함선은 단 13척 뿐. 200여척의 왜선들이 몰려오자 조선군은 말 그대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이순신에 이어 수군 서열 2위인 경상우수사 배설이 겁에 질려 도망치는 등 탈영병이 속출하는 절망적 상황에서 외친 절박한 호소였다.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낸 명량해전 하루 전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비장함으로 가득 찬 이 말은 솔선수범했던 이순신에 대한 부하장수들의 절대적 신뢰가 없었다면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을 것이다.

대통령 외교적 발언, 균형감 갖고 정제된 언어로 수위 조절해야

나토정상회의 참석과 폴란드 방문을 마친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킬 방문도 문제지만, 윤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공동 언론발표 때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생즉사 사즉생의 정신으로 우리가 강력히 연대해 함께 싸워 나간다면 분명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젤렌스키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윤 대통령이 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에 맞게 가려써야 한다. 가장 중요한 요체는 '균형감'이다. 우크라이나가 '사즉생' 정신으로 함께 싸워야만 할 우리의 동맹국인가? 우리가 지금 러시아와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는 중인가? 전쟁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로하고 평화를 촉구하며 인도적 지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을 넘으면 독이 된다.

대통령의 외교적 발언은 수위조절이 관건이다. 엄밀히 정제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과유불급' '한치 건너 두치' 란 말들이 바로 이에 해당하는 경구들이다. 윤 대통령은 '가치외교'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선봉장으로서 뿌듯함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러시아로서는 지금 선전포고를 하는 것인가 의아해하지 않았을까. 수십년 간 러시아와 맺어온 긴밀한 관계, 현지진출 기업들과 교민들의 안전 등을 충분히 검토한 상태에서 한 언행인가.

러시아는 우리의 중요한 경제 파트너이기도 하지만 중국과 함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북한핵을 포함해 안보불안 '한반도 리스크'를 관리하는데 협력해야 할 중요한 국가다. 그런데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을 더욱 부추기는 형국으로만 몰아간다.

집중호우로 국민고통 극심한데 명품매장 찾은 김건희 여사

대통령실은 '국군 파병지 아닌 전장에 간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운다. 반면 '생즉사 사즉생'이란 발언은 결연한 의지의 표현일 뿐이라며 파장축소에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머잖아 살상용 무기지원에 나서는 신호탄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를 장기전 양상으로 굳어지고, 서방의 탄약재고가 바닥나 비인도적 살상무기인 집속탄까지 사용할 것이라 한다. 그럴수록 미국의 살상무기 지원압박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인접 유럽국가들도 피로감을 호소하며 차츰 발을 빼려는 기색인데 우리가 강력한 구원투수로 나서겠다는 말인가.

미국에 올인하는 정책으로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 대일 굴욕외교에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 용인까지 계속 꼬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은 집중호우에 수십명이 목숨을 잃는 등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김건희 여사는 리투아니아 명품매장 5곳에 들린 것이 현지 언론에 보도돼 국민 염장을 지르고 있다. 공감능력 제로다.

이순신의 '사즉생' 호소가 먹히며 해전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것은 그가 쌓아 온 굳건한 신뢰가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나 하나.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