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도를 넘어선 내년 예산안 증액 요구

2023-11-24 11:37:28 게재
총선이 정말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이 난무하고 있으니 그렇다. 모두가 민생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정도가 심하다는 느낌이다. 특히 예산안 증액은 정부의 동의가 필수적인데도 무분별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정치권의 내년도 예산안 증액 요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여야 가리지 않고 표 의식한 예산안 증액 요구 봇물

여당인 국민의힘은 건전재정 기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년도 예산안에 40개 현금성 복지 사업을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노인 복지와 관련, 건강보험에서 지원하는 임플란트 개수를 2개에서 4개로 늘리고 어르신 무릎관절 수술 지원 대상자를 추가 확대하기로 했다. 또한 정년에 이른 근로자를 계속 고용할 때 사업주에게 주는 '고령자계속고용장려금' 대상 연령을 한 살 올리고 기초연금을 40만원으로 단계적으로 인상하기로 했다. 이밖에 △타 지역 기업 인턴 참여 청년에게 체류비 지급 △월 30만원인 이장·통장의 기본수당 40만원으로 인상 △명절 기간 반값 여객선 운영 △온누리상품권과 농·축·수산물 할인 쿠폰 발행 확대 △대학생 '1000원 아침밥 사업' 확대 등도 추진하기로 했다.

반면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부가 돈을 풀지 않아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경제 위기가 심화됐다면서 아예 정부 지출 확대를 통한 경기 부양을 요구했다. 막대한 세수 펑크에도 불구하고 35조원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주장하면서 대학생 무이자 대출과 아동수당 확대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월 3만원짜리 '대중교통 무제한 패스'를 청년에게 지급한 뒤 추후 국민 전체로 확대하며 △연구개발(R&D) 예산과 새만금사업 예산 복원 △요양병원 간병비 급여 지원 △대출이자 지원 △청년·서민 주거복지사업과 지역사랑상품권 예산 확보 등을 내걸었다.

여야의 예산 증액 요구가 민생과 관련되어 있고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시혜적인 증액 사업들이 눈에 띈다. 올해 약 60조원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상 최대의 '세수 펑크'와 나라 곳간 사정은 전혀 안중에 없는 득표용 "선심쓰기 경쟁"이라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여야는 마치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표가 될 만한 선심 정책에는 의기투합하고 있다. 광주와 대구를 잇는 달빛고속철도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이 대표적이다. 소상공인과 농민을 대상으로 한 전기요금 감면과 지역 상품권 발행은 여야 모두가 경쟁적으로 추진하기로 한 정책이다. "선거 매표를 단호히 배격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각오가 무색해지는 형국이다. 또한 재정 적자에 상한선을 두는 이른바 재정준칙 현지 조사를 한다면서 일부 여야 의원들이 합동으로 유럽 출장을 다녀오고도 국회에서는 3년째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포퓰리즘이 한국에서만 성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제채권단의 긴축 요구 거부 공약으로 집권했던 그리스의 치프라스 전 총리가 2019년과 2023년 총선에서 잇달아 참패했다. 최근 실시된 아르헨티나 대선에서도 제3세력 아웃사이더로 평가받는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가 페로니스트(대중영합주의자)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또한 프랑스는 노동계의 극한 시위에도 불구하고 연금개혁을 단행했고, 이탈리아도 노동정책을 개편하는 등 포퓰리즘이 전 세계에서 퇴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정치는 아직도 퍼주기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 예산이 사금융처럼 이용되거나 정쟁 도구로 쓰여선 안돼

우리 경제는 현재 수출부진으로 경제성장률이 일본에 역전당하고, 가계대출은 최악 상태다. 게다가 저출산과 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세금 낼 사람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세금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보다 20년 이상 앞서 노인 국가가 된 일본에서 나온 연구들은 한결같이 고령화와 저출산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 국가는 지속 가능해야 한다.

포퓰리즘이 직접민주주의로 포장돼 국가 예산이 사금융처럼 이용되거나 정쟁의 도구로 쓰여서는 안 된다. 돈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고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지만 공짜 점심은 없다. 이대로 간다면 2005년 이후 가장 낮은 증가율(2.8%)로 짰다는 내년도 예산안 방어는 물 건너갈 것이다. 또한 원칙 없는 증세와 감세가 번갈아 가며 되풀이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암울하고 처참해질 것이 분명한 나라를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어서야 되겠는가.
박현채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