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용의 러시아 톺아보기

대유라시아주의와 국제운송회랑 대전(大戰)

2023-11-27 11:46:11 게재
성원용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

경제전쟁은 각국이 주도하는 개발프로젝트의 총합, 또는 그 밑그림인 대전략의 충돌로 발화된다. 21세기 유라시아판의 대격돌도 다르지 않다. 한편에서 중국의 '일대일로'와 러시아의 '대유라시아주의'가 진용을 갖춰 연대하고, 다른 편에서 미국 등 범서방 세력이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응수하는 양상이다.

러시아의 대유라시아주의는 전환기의 담론이다. 협소한 탈소비에트 공간을 넘어 문명(세력) 교체 시대에 러시아를 필두로 북아시아(중앙유라시아)가 유럽과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통과지대로서 그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려는 일종의 지정학적 기획이다.

대표적인 대륙세력인 러시아는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를 해체하고 다극적 세계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 인식을 중국과 공유하고 있다. 러시아는 구소련 내 지역통합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AEU)과 중국이 주도하는 상하이협력기구(SCO)간 전략적 연대를 강화하고, 나아가 인도와 아세안(ASEAN)을 품어 '대유라시아(Greater Eurasia) 파트너십 체제'를 구축한다는 구상을 펼쳐가고 있다.

3대 기본요소 중 전략산업과 금융은 취약

과연 대유라시아주의는 실현될 수 있을까? 만일 대전략이 공간전략이라면 발전의 물리적 중심을 이동시키고, 공간통합을 주도할 물적토대를 갖추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통상 지경학적 관점에서는 전략산업 교통회랑 금융이라는 세개의 축을 기본요소로 그 물적토대를 평가한다.

우선 러시아에게는 전략산업축이 가장 취약해 보인다. '신기술 기반 경제의 발전'이 긴박한 전략과제이지만 제재로 서구의 선진기술과 자본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고 있다. 당장은 하이테크 수입대체산업화 육성, 비제재국과의 부품 공급망 다변화 등으로 '버티기'에 들어갔지만 지속가능성 여부는 의문이다.

금융통화축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달러 중심의 금융통화 패권에 점차 균열이 일어나는 신호는 있다. 미국 등 서구의 금융제재에 대한 반격으로 루블-위안화 국제결제체제를 강화하고 있고, 페트로-달러 체제는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 글로벌 외환보유고 중 달러 비중도 계속 감소하고 있다. 브릭스(BRICS)의 탈달러화 연대가 가속화되면 반격이 주효할 것이다.

반면 교통물류축의 입지는 훨씬 확고하다. 러시아는 유라시아를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국제운송로 구축에서 가장 선도적인 위치에 있다. 러시아의 전략은 철도를 중심으로 항만과 연계된 복합운송 활성화에 맞춰져 있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바이칼-아무르 철도(BAM)를 중심으로 하는 내륙의 동서축, '남북국제운송회랑' 중심의 남북 종축, 그리고 북극항로(NSR)로 표현되는 북극의 동서축으로 구성된 삼축전략이 핵심이다.

교통물류축, 제재 위기 벗어나 도약 준비

현재 교통물류축은 제재 위기에서 벗어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 철도운송이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올해 1~10월 간 러시아철도공사의 수출입 및 통과운송 실적은 전년 동기 대비 13.8% 증가한 614만4000TEU였다. 유라시아 동서 수평축으로 철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국제운송회랑의 물동량 증가는 제재 이후 중러 교역의 급격한 증가세 덕분이다. 올 10월까지 교역은 전년 대비 27.7% 증가해 1964억달러에 이르렀다. 러시아 관세청은 연말까지 2200억달러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중러 교역 급증은 유라시아철도 노선 이용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일단 전통적인 중국-유럽-중국 간 통과 물동량은 쌍방향 모두 거의 반토막 났다. 대신 러시아가 경제통상관계의 축을 동쪽으로 전환하면서, 특히 러시아의 대중 수입, 러시아와 EAEU의 대중 수출 증대에 힘입어 유라시아와의 수출입 물동량이 늘었다. 올 상반기에만 EAEU-중국 간 유라시아철도 운송실적은 작년 상반기 대비 무려 177.2%나 증가했다.

더불어 중러 접경지역의 풍광도 바꿔놓고 있다. 지난 10월 24일 러시아 교통부 발렌틴 이바노프 차관은 2025년 말까지 총 13개의 중러 국경세관을 현대화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지금껏 개발을 억제하며 이동성을 제한해왔던 러시아가 공세적으로 대중국 연계 인프라 구축과 통관 효율화에 나선 것이다.

남북 종축의 하나인 '남북국제운송회랑'은 발트해와 북극의 러시아 항만을 페르시아만과 인도양 연안의 항만과 연결하는 핵심적인 국제운송회랑이다. 최근 이 회랑은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2023년 8월에 러시아 출발 사우디아라비아 향 화물이 이란을 경유해 성공적으로 운송됐다. 올 5월에는 러시아-이란 간 아스트라-레쉬트구간(162㎞) 철도 건설에 관한 정부간 협정이 서명됐다. 철도가 완공되는 2027년에 이르면 러시아에서 이란의 남부항만까지 관통하는 철도회랑이 구축된다. 2030년이면 남북국제운송회랑 전체 물동량은 현재 1500만톤에서 4100만~4500만톤까지 증대될 것이다. 인도의 경우도 남북국제운송회랑을 활용하면 러시아-인도 간 운송시간도 수에즈운하 노선보다 15일을 단축하고 비용은 약 30% 절감할 수 있다.

한편 러시아에게 북극항로 활성화는 국제운송회랑 패러다임에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올 중대한 전략사업이다. 기존의 남방항로 대비 운항시간과 거리를 대폭 단축하는 물류측면의 기대효과 외에도 북극 지역에 매장된 거대한 광물자원 개발과 대규모 인프라 구축, 북극항로 운항 선박의 혁신 및 조선산업 현대화 등이 상호 긴밀하게 연동된 다중복합프로젝트다. 이미 북극개발회랑은 인류 공동체가 직면한 세기의 과제가 되었고, 개발 주도권은 현재 러시아가 쥐고 있다.

러시아의 로스아톰(Rosatom)사의 북극개발 특별 대표인 블라디미르 파노프에 따르면 올 1~10월 2023년 북극항로의 총운송량은 전년 동기 대비 6% 증가한 3140만톤이었다. 작년 한해의 실적은 3400만톤이었다. 제재 이후 증가세로의 전환이 역력하다. 북극항로의 회복을 상징하는 지표는 통과화물 증가다. 전쟁이 발발한 2022년 통과 물동량은 전년 대비 약 90% 감소한 20만톤 수준까지 추락했다. 하지만 올 1~10월 집계만으로도 통과 물동량은 이미 212만톤에 달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제운송회랑 대전의 최종 승자 가능성

과연 러시아는 21세기 국제운송회랑 대전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지정학적 위치, 인프라 구비 및 운용, 교통전략 측면에서 가장 앞서 있기에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북극항로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그렇지만 '러시아 우회' 노선을 구축하려는 주변국들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2021년 EU의 '글로벌 게이트웨이' 전략, 2023년 9월 뉴델리 G20 정상회의에서 제기된 인도~중동~유럽 '철도·해운회랑' 구상 등의 반격이 지속되고 있다. 일단은 중국의 일대일로를 봉쇄·대체한다는 데 맞춰진 측면이 강하지만 상황에 따라 러시아의 전략적 입지를 훼손할 수도 있다.

포탄이 날아들고 화염이 자욱한 전쟁터만 상상해서는 안된다. 시멘트 흙먼지 폴폴 날리고 덤프트럭이 질주하는 유라시아 도처의 경제회랑 건설 현장도 가혹한 혈전의 전쟁터이기는 마찬가지다.

현재 대한민국은 미국 등 서구가 주조한 '인도-태평양 전략'과 '신냉전' 구도에 갇혀 유라시아의 역동적인 변화를 놓치고 있다. 바라건대 정책 의제에서 무모하게 지워버린 '북방' '유라시아' '대륙'을 하루속히 되살려야 유라시아 국제운송회랑 대전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야만 망각 속에서 희미해지는 한반도 '해륙복합화' 전략 실현의 이념적·물리적 토대도 지켜나갈 수 있고, 우크라이나 종전 후 새롭게 열리게 될 유라시아 시대로의 도약판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원용 인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