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가습기살균제 사태' 교훈은 어디에

2024-01-23 11:33:34 게재
지난 9일 경기도 화성시 화학물질 저장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창고에는 144종의 화학물질 361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로 말미암아 일부 화학물질이 근처 하천으로 흘러들어가 물빛이 옥색으로 변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사고 다음날 한강유역환경청과 경기도보건환경연구원이 수질을 측정한 결과 구리 벤젠 나프탈렌 등 5종의 수질유해물질이 기준치의 2~36배 검출됐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날 국회에서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신규 화학물질 등록기준을 '연간 100㎏'에서 '연간 1톤'으로 완화해 기업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골자다.

화평법에 따르면 기존에 유통되거나 유해성 심사를 받은 물질이 아닌 '신규 화학물질'을 일정량 이상 제조 또는 수입하려면 사전에 환경부에 등록해야 한다. 화평법은 2013년 제정돼 2015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했다. 2007년 유럽연합(EU)을 필두로 세계각국이 화학물질 규제를 도입함에 따라 여기에 동참한 것이다.

화평법·화관법 완화, 재건축 기준 완하가 정답인가

그러나 기업들에게는 몹시 불편했던 것 같다. 그래서 기준완화를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국내 규제가 EU보다 엄격한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어쨌든 이번에 원하던 것을 기어코 얻어낸 것이다. 윤석열정부가 출범 이후 추진해온 '킬러규제 없애기' 흐름에 올라탄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따라 신규 화학물질을 생산하거나 수입하려는 기업들이 누리는 자유가 '10배' 확대됐다. 그런데 1톤이라는 완화된 기준은 제대로 지켜질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그런 기준조차 빠져나가기 위한 편법이 더 기승을 부릴 수도 있다. 그러다가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가습기살균제 사태 같은 것이 또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사태는 1994년부터 시중에 유통된 가습기살균제 사용자들이 폐 손상 등의 피해를 본 것으로 2011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지난해 말 지원 대상 피해자는 5700명에 육박한다. 이 가운데 1200여명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그렇지만 해로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는 지난 11일 열린 2심에서야 유죄판결을 받았다. 사건이 알려진지 무려 13년이나 흘렀다.

이런 뼈아픈 경험을 하고도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회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앞으로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일어나면 누가 책일질 것인가? 이제라도 이런 우려를 서둘러 살피고 부작용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기업에 대한 규제완화는 역대정부가 모두 주장해왔지만 윤석열정부 들어 더욱 두드러진다. 아파트를 지은 지 30년이 넘었다면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않아도 재건축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정책도 그런 노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재개발 사업의 장벽도 낮아진다. 지금은 30년 넘은 건물이 전체의 2/3를 넘어야 재개발을 시작할 수 있는데 이를 60%로 완화한다.

재건축 규제완화를 왜 지금 들고 나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역대 보수정부에서도 재건축연한 30년에 대해서는 특별히 논란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건설업계와 시민들도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철근콘크리트 아파트라면 적어도 30년, 아니면 그 이상 견딜 수 있도록 지어져야 한다는 공감대도 있었다. 이런 공감대를 아무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뒤집을 만한 분명하고 절박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건설사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도 있다. 어차피 30년 지나면 재건축 대상이 될 터이니 '적당한' 정도의 내구성만 갖추고 끝내려는 유혹이다. 부실한 시공과 하자가 더욱 늘어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리고 이제는 대형마트 공휴일 의무휴업도 없애기로 작정했다. 코로나19로 인해 타격받은 소상공인들이 여전히 빚에 허덕이는 이때 아무래도 무리가 아닌가 한다.

규제완화는 사유 뚜렷하고 시기 잘 선택해야

규제완화는 그 사유가 뚜렷해야 하고 시기선택도 잘해야 한다. 부작용이 없거나 아주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효과가 커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도 크게 늘어난다. 따라서 이를 막을 확실한 대책도 먀련돼야 하는 것이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신중해야 한다. 규제완화라는 미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된다.
차기태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