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피해자, 일본 기업서 6천만원 받아내

2024-02-21 13:00:01 게재

가해기업 첫 배상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피해자가 가해자 일본 기업의 돈을 받아낸 첫 사례가 나왔다. 가해기업이 국내 법원에 공탁했던 돈을 출급한 것이지만 ‘1호 배상’으로도 볼 수 있어 파장이 예상된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일 일본 기업 히타치조센이 담보금 성격으로 공탁한 6000만원을 강제 징용 피해자 고 이희열씨의 유족 5명에게 지급했다고 밝혔다. 이날 법원이 히타치조센 공탁금을 지급한 것은 지난해 12월 대법원이 “히타치조센은 이씨 유족들에게 손해배상 및 지연이자 합계 1억원을 지급하라”고 확정판결한데 따른다.

이씨는 지난 2014년 11월 히타치조센을 상대로 강제 징용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씨는 1944년 일본 히타치조선소 등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이씨가 재판 중에 숨지면서 유족들이 소송을 물려받았다.

이씨의 소송은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2차 소송’ 중 하나다. 다른 피해자들이 지난 2005년 먼저 낸 ‘1차 소송’에 대해 대법원이 2012년 “일본 기업들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하면서다. 당시 히타치조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강제 징용 피해자는 이씨가 유일했다.

◆한국법원에 돈 낸 유일 사례= 히타치조센은 1심과 2심에서 강제징용 피해 손해배상금을 이씨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선고가 잇따르자 2019년 1월 강제집행 정지를 청구하면서 담보금 성격으로 6000만원을 법원에 공탁했다. 히타치조센의 공탁금은 강제징용 기업이 한국 법원에 돈을 낸 유일한 사례이다. 이씨 유족들은 대법원 승소 확정판결을 근거로 지난 1월 법원에서 히타치조센 공탁금에 대한 압류 추심 명령을 받아냈고 이번에 돈을 지급받았다.

이씨 유족들을 대리하는 이 민 변호사는 이날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낸 돈이 강제 징용 피해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공탁금에서 변제되는 배상금을 제외한 나머지 4000만원에 대해서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서 제안하는 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라고 했다. 행정안전부 산하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국내 법원에서 확정된 강제 징용 배상금을 일본 기업 대신 지급하는 ‘제3자 변제’ 방식으로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다.

재단은 이씨측이 제3자 변제를 신청할 경우 적법한 절차를 거쳐 배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안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판결은 계속이어지고 있지만, 재단의 가용 현금이 15억원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광주지법 민사합의14부(나 경 부장판사)는 피해자 유가족 15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상속분에 따라 1900만~1억원을 각각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한편 일본 기업을 상대로 대법원에서 승소한 강제징용 피해자는 총 60명이다.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배상금은 지연 이자를 포함해 20일 기준 95억원에 달한다.

◆피해자에 실제 배상, 산 넘어 산= 법적 절차도 순조롭지 않다. 피해자들은 국내 재단의 제3자 변제를 거부하고, 법원은 이를 수용해 불수리 결정을 하고 있다. 제3자 변제를 거부한 양금덕 김성주 할머니가 미쓰비시중공업의 상표권 등 한국 내 자산을 매각해 달라며 낸 신청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만약 이 사건에서 최종 승소할 경우 피해자측은 강제집행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일본 정부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이날 “극히 유감스럽다”며 “엄중한 항의의 뜻을 한국 정부에 전달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에서도 한국 재단이 일본 기업 대신 배상하는 ‘제3자 변제 해법’을 적용할 것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실제로 배상금을 받을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서원호 기자 o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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