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장 리포트

미 대선 새로운 변수로 떠오른 ‘냉동배아 판결’

2024-02-27 13:00:01 게재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대법원의 최근 판결이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체외 수정 후 아직 자궁에 이식되기 전인 냉동배아 (수정란)도 법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라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원고들은 불임클리닉에 보관하고 있던 냉동배아가 실수로 폐기되자 병원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다. 미성년 자녀가 부당한 죽음을 당한 경우 부모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용한 1872년에 만든 법을 근거로 들었다. 앨라배마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주 (州)헌법에 명시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도 신성하며 태아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문구를 언급하면서 미성년 자녀는 뱃속의 태아뿐 아니라 체외수정 후 아직 자궁에 이식되지 않은 배아도 포함된다고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수백개의 세포로 구성된 배아에게 사람과 동일한 법적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톰 파커 대법원장은 성경의 창세기를 인용해 “태어나기 전부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분노를 사지 않고서는 그 누구의 생명도 파괴될 수 없다”고 썼다. 그는 성경 구절을 인용해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한 보수 법관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종교 관점에 기반해 수정되는 순간부터 생명이 시작되고 따라서 산모의 건강이나 선택권보다 더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믿는 낙태반대론자들은 이번 판결을 낙태반대 운동의 진일보로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거리두기 나선 트럼프, 문제삼는 바이든

하지만 그동안 낙태권 제한에 앞장서 온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지난 2022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헌법상의 권리로 보장한 ‘로 대 웨이드 (Roe v. Wade)’ 판결을 49년 만에 뒤집은 것이 선거에서 공화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번 앨라배마주 판결이 공화당 후보들에게 새로운 ‘악몽’이 되지 않도록 몸을 사리면서, 특히 중도층의 표를 잡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낙태 반대 입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선거를 앞두고 이번 판결의 입장과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15~44세 사이의 미국 여성들 10명 중 1명은 불임치료를 받았다. 다양한 치료법 중 대표적인 것이 시험관 시술 또는 체외수정으로 알려진 IVF(in vitro fertilization)다. 또한 해마다 시험관 시술을 통해 태어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의하면 2021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 시험관 시술을 통해 태어난 신생아 수는 9만 7000명이 넘는다.

이렇듯 미국인들 사이에서 IVF는 아이를 낳기 위한 방법으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현실을 의식해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인 트럼프는 “공화당은 항상 생명의 기적의 편에 서야 한다. 부모와 그들의 아름다운 아기들의 편에 서야 한다”면서 IVF를 보장하는 법을 통과시키라고 앨라배마 주의회에 촉구하고 나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입장은 그의 강력한 지지 기반인 기독교 보수우파의 의견과 대비된다. 앨라배마주 상원의원인 공화당의 팀 멜슨 또한 배아가 여성의 자궁에 이식되기 전까지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법안을 도입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최대한 이번 판결이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반면 민주당은 이번 판결을 다가오는 11월 선거의 주요 이슈로 삼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공화당 우세 주들에서 임신과 출산에 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제한을 두는 방안들이 가속화될수록 이에 반대하는 중도층을 민주당 지지로 결집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22일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서를 통해 “자기 스스로와 가족을 위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은 충격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다”며 법원의 판결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백악관 대변인 카린 장-피에르는 이번 판결을 두고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고 개별 가정이 내릴 수 있는 가장 개인적인 결정에 대해 정치인들이 이래라저래라 지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을 때 우리가 예상했던 혼란이 일어난 것”이라면서 바이든정부는 의회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연방법으로 입법화할 것을 촉구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민주당 소속 뉴욕주지사 캐시 호철은 “이것은 공화당 판사가 있는 공화당 주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면서 “그들은 이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극단적 낙태반대론자 운동 더 강화될 것

이번 판결이 11월 대선에 실제로 얼마나 영향을 미치게 될지 예견하는 것은 아직 섣부른 듯하다. 하지만 앨라배마주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재생산권과 건강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불임치료 전문가들과 법조인들은 이번 판결로 인해 배아의 보관과 시험관아기 시술 등 난임여성에게 필요한 의료서비스가 심각하게 제한될 위험에 빠졌다고 경고한다.

시험관 시술을 할 경우 보통 임신이 성공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개의 배아를 만들고 이후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배아는 폐기한다. 이번 판결에 비춰보면 배아를 폐기하는 의료행위가 살인죄로 처벌 받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은 미래에 올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배아를 냉동하거나 각종 검사를 통해 문제가 있는 배아를 골라내는 것도 위법의 소지가 있다. 미국생식의학회 (ASRM) 회장 아마토 박사는 이번 판결로 젊은 의사들이 실습이나 진료를 위해 앨라배마에 가는 것을 중단하게 될 것이며, 민사 또는 형사고발을 당할 위험이 있는 경우 불임클리닉이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앨라배마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현대적인 불임치료의 혜택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실제 우려는 더 빨리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법원 판결이 내려진 지 닷새 만에 앨라배마주에서 가장 큰 병원인 앨라배마 대학병원이 시험관 시술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앨라배마주 다른 두곳의 난임클리닉도 이번 판결이 미칠 잠재적 결과를 분석하는 동안 시술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미국의 한 주요 배아 운송 회사는 앨라배마에서의 사업을 일시중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다른 주로 냉동배아를 옮겨서라도 시험관 시술을 계속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 방법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앨라배마주에 그치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도 난임 치료 환자와 의료진 모두에게 복잡한 법적문제가 제기될 가능성 또한 크다. 이번 판결의 효력이 앨라배마주에만 국한되어 있지만 법률 전문가들은 이 판결로 인해 수정된 순간부터 태아에게 사람과 같은 법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낙태반대론자들의 운동이 더 강화되어 다른 주에서도 비슷한 법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예견한다.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아이들

앨라배마주는 이미 미국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낙태를 금지하고 있는 주들 중 하나다. 강간이나 근친상간 등의 경우에도 예외를 두지 않고 거의 모든 낙태를 금지하고 있다. 타주에 가서 낙태를 하는 여성을 돕는 사람도 모두 기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곳이다. 자연스럽게 앨라배마주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기피하는 주가 되었고, 잇달아 산부인과 병원들이 문을 닫으면서 산전 진료를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더 길어졌다.

이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바로 여성과 아이들이다. 작년에 나온 한 보고서에 따르면 앨라배마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200만명 이상의 가임기 여성이 이른바 ‘진료 사막’ 지역에 살고 있다. 산부인과나 조산소 같은 출산 시설과 의료서비스 제공자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그 결과 앨라배마주는 미국에서 산모 사망률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다. 2021년 영아 사망률은 미국에서 3번째로 높았다. 이번 판결이 가져올 많은 결과들 중 분명한 것 하나는 여성과 아이들이 겪는 이런 열악한 의료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남수경 뉴욕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