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해진 유럽 ‘전쟁 금기’ 깨나

2024-02-29 13:00:02 게재

우크라 파병론 이어 러 동결자금 사용 거론 … 트럼프 재선 가능성에 불안

28일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 지역의 최전선 근처 오리히브의 주거용 건물이 파손되어있다. 러시아가 침공하기 전 1만5000명의 주민이 거주했던 것과는 달리, 현재는 대부분 노인인 약 천여명이 포격을 피해 하루의 대부분을 지하실에서 살고 있다. EPA=연합뉴스
유럽이 다급해졌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 지원이 예상보다 지체되는 가운데 전황마저 나쁘다. 이렇게 되자 그간 금기시 되던 대책까지 공론화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28일(현지시간) 유럽의회 본회의 연설에서 “이제는 러시아 동결자산의 초과 이익금을 우크라이나를 위한 군사장비 공동구매에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대화를 시작할 때”라고 말했다. EU 지도부의 공식 제안은 이번이 처음이다. EU는 러시아 동결자산에서 발생한 이자, 배당금 등 수익금을 민간 분야 재건에 활용하자는 안엔 가까스로 합의했다.

역내 예치된 제3국 자산이나 파생 수익을 ‘임의로’ 활용하는 것은 전례가 거의 없고 법적절차 역시 쉽지 않다는 반론이 강했다. 더구나 동결자산 수익금으로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무기를 사자는 구상은 회원국 간 찬반 논쟁을 부를 공산이 크다.

그런데도 EU 집행위원장이 공개석상에서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우크라이나 상황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선 미국의 추가 지원이 공화당 반대로 불투명해졌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 역시 동결자산 압류에 유보적이었다가 최근 입장을 선회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은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동결자산 몰수에 대해 “이것을 추진하기 위한 국제법적, 경제적, 도덕적 근거가 탄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도 유럽의 조급함이 커지는 이유다. 전현직 대통령의 재대결에서 만약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하면 우크라이나 지원 부담을 오롯이 유럽이 감당해야 한다는 우려가 증폭하고 있다. 더구나 트럼프 당선시 우크라 지원은 물론이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집단방위체제가 근본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것도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더욱이 일부에서는 러시아가 나토 결속이 취약해진 틈을 노려 또 다른 유럽 국가를 노릴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이날 “전쟁 위협이 임박한 건 아닐지 몰라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라며 방위비 투자 확대를 강조한 것 역시 이런 배경에서다.

최근 불거진 우크라이나 파병론도 비슷한 맥락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6일 나토 회원국의 우크라이나 파병 가능성에 대해 “어떤 것도 배제돼서는 안 된다”면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용하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말했다. 물론 파병에 대해 “합의된 것은 없다”고 전제하긴 했지만 모호한 표현으로 파병설에 불을 지폈다. 파병은 거론 그 자체만으로 나토 방침과 정면 배치된다.

나토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부터 ‘나토는 전쟁 당사자가 아니다’라며 러시아와 직접 충돌을 유발할 파병과 같은 적극적 군사개입에 선을 그어왔다. 마크롱 발언 직후 미국과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체코 등은 즉시 일축했지만 파문은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28일 라트비아는 나토 동맹국 간 합의를 전제로 파병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혔다. 라트비아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dpa통신에 “우크라이나 지원을 늘리기 위해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나토 동맹국이 파병에 합의하면 라트비아도 참여를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벨라루스와 국경을 맞댄 라트비아는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프랑스발 파병론을 두고 마크롱 대통령의 무리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그만큼 우크라 전황이 서방의 기대와 다르게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EU는 또 ‘메이드 인 유럽’이라는 원칙도 꺾는 분위기다. EU는 우크라이나 군사지원 기금인 유럽평화기금(EPF) 사용처와 관련해 유럽 바깥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용 탄약을 구매해도 기금 지출을 허용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이 문제에 대해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 국가가 반대했으나 우크라이나에 약속한 탄약 100만발 전달이 크게 지연되면서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기조가 확산한 것으로 전해졌다.

EU에서의 파병론 등장에 대해 러시아는 강력 경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8일 마크롱 대통령을 겨냥해 “우크라이나에 파견하는 모든 군대는 1812년 러시아 침공이 죽음과 패배로 끝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군과 같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 두마(하원) 의장인 바체슬라프 볼로딘 역시 마크롱이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며 프랑스 황제의 뒤를 따르지 말라고 경고했다.

볼로딘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마크롱)의 계획은 프랑스 시민들에게 위험해지고 있다”면서 “그런 발언을 하기 전에 축축한 땅에 누워 있던 나폴레옹과 60만명 이상의 병사들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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