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헌법에 ‘낙태할 자유’ 명시

2024-03-05 13:00:02 게재

상하원 합동회의서 압도적 찬성 … 파리 시내 광장서 지지자들 모여 ‘환호’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가운데)가 4일 파리 외곽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양원(하워과 상원) 특별 회의에서 의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프랑스 의원들은 헌법에 낙태권 조항을 추가하는 것을 통과시켜 임신 중단 권리를 명확히 보호하는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됐다. EPA=연합뉴스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헌법상 낙태할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가 됐다. 프랑스 상원과 하원은 4일(현지시간) 베르사유궁전에서 합동회의를 열어 헌법 개정안을 표결한 끝에 찬성 780표, 반대 72표로 가결 처리했다. 표결엔 전체 의원 925명 가운데 902명이 참석했으며, 개헌에 반대했던 제라르 라셰 상원 의장 등 50명은 기권했다.

합동회의에서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면 유효표(852표)의 5분의 3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데, 이날 찬성표는 의결 정족수인 512명보다 훨씬 많았다.

개헌에 따라 프랑스 헌법 제34조에는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으로 정한다’는 조항이 추가돼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헌법에 명문화됐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이미 1975년부터 낙태를 비범죄화하면서 허용되고 있어 이번 개헌으로 실질적으로 바뀌는 조치는 없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낙태 합법화를 위한 투쟁은 1971년 프랑스 여성 343명이 프랑스 페미니스트 시몬드 보부아르가 비밀리에 불법낙태를 해왔다고 선언하고 법개정을 요구하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 뒤 4년 후인 1975년에 여성운동가이자 보건장관인 시몬 베이유는 낙태를 비범죄화하고 임신중절을 위한 의료서비스를 제한적으로 제공하는 임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프랑스에서 낙태권을 보장하는 법은 지속적으로 확대돼 현재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 중 하나로 간주될 정도로 범위가 넓어졌다. 가령 임신 14주까지의 여성이나 미성년자가 요청할 경우 대기 기간이나 필수상담 없이 전액 지원되는 낙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 있다. 또 임신이 여성의 신체적 또는 정신적 건강에 위험하다고 판단되거나 태아에게 특정 이상이 있는 경우에도 낙태가 허용된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프랑스에서는 낙태를 원하는 여성이 가상으로 의료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 29개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프랑스는 스웨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낙태 합법화에 대한 지지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의회 결정에 대해 마크롱 행정부는 반색했다.

삼권 분립 원칙에 따라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투표 결과 발표 직후 엑스(X·옛 트위터)에 “프랑스의 자부심,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평가하면서 오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헌법 국새 날인식을 공개적으로 열어 축하하겠다고 밝혔다.

가브리엘 아탈 총리도 엑스에 “오늘 프랑스는 여성의 몸은 여성의 소유이며 누구도 여성의 몸을 대신 처분할 권리가 없다는 역사적인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냈다”며 “이는 시몬 베이유와 그 길을 닦은 모든 이들의 두 번째 승리”라고 말했다.

여성으로서 양원 합동회의를 사상 첫 주재한 야엘 브룬 피베 하원 의장 역시 엑스에 “프랑스에서 낙태는 영원히 권리가 될 것”이라며 “이 강력한 행위를 통해 프랑스는 당파적 분열을 넘어 다시 하나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스테판 세주르네 외교부 장관은 프랑스 헌법을 넘어 “유럽 헌장에 이 내용이 명시되길 바란다”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마크롱 행정부는 2022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 약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자 낙태권을 헌법에 명시해 되돌릴 수 없는 권리로 만들기로 추진했다. 그해 11월 하원에서 낙태할 ‘권리’를 명시한 의원 발의 개헌안을 승인했으나 3개월 뒤 상원에서 ‘권리’가 ‘자유’로 수정된 안이 통과돼 헌법 개정에 실패했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양원이 동일 문구의 개헌안을 의결해야 한다. 이에 마크롱 정부는 직접 개헌을 주도하기로 하고 ‘낙태할 자유 보장’이라는 절충 문구로 개헌안을 발의해 상·하원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날 투표를 앞두고 파리 시내와 투표 현장 인근에서는 개헌 찬성·반대 지지가 각각 열렸다.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에는 수백명의 시민이 대형 스크린 앞에 모여 투표 상황을 지켜보며 개헌 지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개헌안이 통과되자 환호성을 지르며 여성 인권의 역사적인 진전을 축하했다. 파리시는 트로카데로 광장 맞은편의 에펠탑에 불을 밝히며 ‘나의 몸, 나의 선택’이라는 메시지를 띄우기도 했다.

반면 베르사유궁전 근처에서는 낙태에 반대하는 550명이 모여 개헌 반대 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주도한 ‘생명을 위한 행진’의 대변인 마리리스 펠리시에(22)는 현지 언론에 “낙태는 자궁에 있는 인간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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