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 세상을 광고합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익숙하게

2024-03-17 11:50:28 게재

책을 읽을 때 인상적인 구절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버릇이 있다. 어마어마한 명문장이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맘에 들면 아무리 짧은 구절이라도 어김없이 붙이는 편이라 소장서 중 포스트잇 없는 책은 읽지 않은 책일 가능성이 높다. 독서 후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은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란 글자는 남김없이 다 읽었건만 포스트잇을 한 군데도 붙이지 못한 책이 손에 덩그라니 남았을 때다. 간혹 이런 순간을 맞닥뜨리면 이렇게 건질 것 없는 책을 출판하다니 한탄하며 책과 저자와 출판사를 맘속으로 타박하고 그들에게 흘러간 책값을 아까워하곤 했다.

유제상의 신간 ‘세상을 광고합니다’를 읽고 나니 어쩌면 그 책들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시선’이 문제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국내 광고인으로는 최초로 칸 광고제에서 수상하는 등 유명 카피라이터의 삶을 살았다. 무서운 속도로 트렌드가 변하는 광고계에서 33년을 버틸 수 있었던 그의 노하우가 한두 가지는 아니겠지만 이 책에서 한 가지만 추출하자면 ‘낯설게 보는 시선’일지 모르겠다 싶어서다.

책
유제상/깊은샘/ 1만7500원

틀에 박힌 액션영화나 나쁜 놈들 백과사전같은 미드의 대사 한 줄. “신에게 산을 옮겨달라고 기도하면 다음날 삽이 옆에 놓여 있을 것이다.”

한적한 시골마을 사람 없는 가게에 줄지어 있는 채소들과 천원짜리, 이천원짜리 가격표. 그 다음 눈에 띈 “공짜 아뉴” “우리는 밭에 갔슈” 삐뚤빼뚤 할머니 글씨.

스쳐갈 수도 있었던 한 줄을 기어코 건져내 새롭게 보게 만드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익숙한 것도 낯설게, 낯선 것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광고 카피라는데 아마 그런 시선을 가지려면 겸손함도 필수로 장착해야 하리라. 손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읽고 딱히 남는 대목이 없었다는 에피소드가 눈에 띄었다. 아마 기자라면 ‘책값 도둑’들에게 분노하며 책을 던지는 것으로 에피소드를 마무리했을 텐데 저자의 결론은 사뭇 달랐다. “어느 대가가 네 번이나 읽은 책을 두 번 읽고 이해하려 하다니 참 딱하다”며 스스로를 탓했다.

분명 다른 사람의 말이지만 읽다 보면 발상의 전환이라는 한 가지 맥락이 이어지는 인용구도 흥미롭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 불쾌한 것투성이, 지긋지긋한 것투성이,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이 재미있다고 발상을 전환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진흙으로 만든 인형 같은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마루야마 겐지)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이 멀어질 때 당신의 공간은 거대해지고 별들이 들어섭니다.”(릴케) “늙는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면 젊은 날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워할 기회를 주는 것”(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

저자는 ‘낯설게 보는 시선’을 유지하려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광고를 만들며,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며, 그리고 사람을 만나며 쓴 114편의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면 독자들도 흔한 돌멩이를 빛나는 보석으로 만드는 카피라이터의 시선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김형선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