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앞세운 트뤼도 총리 승부수 통할까

2024-05-08 13:00:02 게재

올해 예산안에 젊은층 지원 재원 마련 위해 ‘부자증세’ 카드 … 경제계 의료계 거센 반발

‘모든 세대에 대한 공정성’. 캐나다 연방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2024년도 예산안의 핵심 키워드다. 저스틴 트뤼도 총리가 이끄는 자유당정부는 이번 예산안에 대해 “모든 세대에 효과적인, 즉 젊은세대가 발전할 수 있고, 이들의 노력이 보상을 받을 수 있으며, 열심히 일해서 내 집을 장만하거나 월세를 낼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중산층의 삶을 공정하게 누릴 기회를 만들기 위한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부총리가 예산안을 직접 발표한 이후 ‘자본이득세(Capital Gains Tax)’, 이른바 ‘부자증세’와 관련한 찬반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최근 지지율 하락세로 곤혹스런 처지에 놓은 트뤼도 총리가 예산안 발표로 분위기 반전을 꾀했지만 한번 등을 돌린 캐나다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형국이다.

0.13% 부자에 대한 증세

자본이득세 변경안의 핵심은 자산매각 등에 따른 수익이 연간 25만캐나다달러(약 2억5000만원, 이하 달러)를 초과하는 개인과 법인 등에 부과하는 세율을 기존 50%에서 67%로 늘리는 것이다. 연방정부는 이번 증세로 5년간 190억달러(약 19조원)를 거둬들일 것으로 예상한다. 자유당정부는 늘어난 세수를 활용해 공공용지에 25만채 등 주택공급 확대와 청년세대, 저소득층 지원에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캐나다정부는 예산안이 연방의회를 통과하면 세율변경에 따라 국내기업의 약 12%가 자본이득세 인상의 적용을 받으며, 개인은 연 평균소득이 142만달러 이상인 전체 국민의 약 0.13%만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30세 미만 인구 가운데는 0.01%만 2025년에 25만달러 이상의 자본소득을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했다. 또 이번 세제개편이 자본이득을 통해 소득을 얻는 사람들과 직업을 갖고 가계소득을 충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조세 형평성을 확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방재무부는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가 대부분은 자본이득의 100% 가까운 세금을 납부한다는 점에서 캐나다는 여전히 자본이득에 대한 세금 경쟁력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연방정부는 “현재 캐나다의 조세 체계는 임금 자본이득 배당금으로 벌어들인 소득에 대한 세금부과에서 세대간 계층간 불일치가 있으며 부유한 개인에게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세법 개정에 찬성하는 경제학자들도 세율을 높이면 모든 유형의 소득에 대해 비슷하게 과세할 수 있게 돼 조세제도가 개선된다고 밝혔다. 공인회계사협회(CPA Canada) 관계자는 “25만달러라는 상한선은 대부분의 부유하지 않은 개인이 정기적으로 증세의 영향을 받지는 않을 수준”이라면서도 “다만 일부는 상속이나 자산매각 이민 등 1회성 이벤트가 있을 때 자본이득세 납부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반발하는 세력은 의료계

예산안 발표 이후 여론조사업체 레거(Leger)는 시민 1522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응답자의 65%는 2031년까지 390만채 주택건설에 85억달러를 지출하는 계획에는 긍정적 신호를 보였지만 전체 예산안에 찬성한 응답자는 20%에 불과했다.

특히 경제계의 반발이 거세다. 제조업 및 무역협회(Canadian Manufacturers & Exporters Trade Association)는 이번 예산안이 통과되면 “이미 취약한 캐나다의 투자 성과를 약화시키고 해외투자를 억제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9만7000여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중소기업연맹(Canadian Federation of Independent Business)도 “기업가들의 사업 성장에 대한 동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반발했다. 벤처캐피털협회는 “경제성장과 확장에 대한 연방정부의 야망이 부족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금융계도 냉소적이다.

자본이득세 증세 논란에 캐나다의사협회(Canadian Medical Association)도 뛰어들었다. 이 예산안이 연방의회를 통과하면 의료 인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큰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BNN블룸버그 뉴스는 “의료계가 어쩌면 자본이득세 증세에 반대하는 가장 큰 그룹”이라고 전했다.

캐슬린 로스 의사협회장은 “많은 의사들의 은퇴에 대비한 저축을 위해 많은 회사에 투자를 하고 있는데, 기업체가 더 높은 세금에 직면하고 세율이 높아지면 의사들 입장에서도 은퇴 이후의 생활비 마련에 재정적 부담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향후 캐나다의 의사 채용 및 의료인력 유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트뤼도 총리는 의사협회의 반발에 “젊은이들의 미래와 관련해 좀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면서 “우리는 이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들에게 조금 더 사회적 부담을 지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맞받았다.

정치적 손익계산에서 출발한 ‘공정’

집권 9년차를 맞은 저스틴 트뤼도 총리의 인기는 최근 곤두박질치고 있다. 지지율 20~30% 안팎을 기록하면서 보수당에 뒤진 지 오래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 2~3년 사이 이자율 급등에다 식료품 인플레이션이 연간 10% 이상 치솟고, 주택공급 부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자유당에 대한 지지세는 크게 꺾였다.

특히 토론토의 경우 1베드룸 아파트 월세가 2500달러에 이르자 젊은층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더구나 집권 자유당은 이민확대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는데, 이민자 증가에 따라 주택부족 문제가 심각해지고 범죄율도 오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트뤼도 총리는 더욱 코너로 몰렸다. 자유당정부가 ‘공정’이라는 키워드를 꺼낸 배경이다.

이 예산안은 한때 자유당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나 경제적 위기로 인해 점점 더 보수당으로 옮겨가고 있는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트뤼도 총리의 노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트뤼도 총리는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요구받는 부자들은 그동안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라며 “우리는 X세대, 베이비붐세대가 인생을 시작했을 때 누렸던 것과 같은 기회를 현재의 젊은이들도 가질 수 있도록 부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CBC뉴스는 “예산안 발표 이후에도 젊은세대 유권자들은 다음 총선에서 자유당에 투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고 있다”면서 입소스 등의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해 자유당은 보수당에 비해 20%p 가까이 지지율에서 뒤져 있다고 보도했다.

캐나다 연방 보수당 피에르 포이리에브 대표는 2024 예산에 대해 “낭비적이고 인플레이션 요소가 많다”며 하원에서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다만 보수당 관계자는 CTV 뉴스와 인터뷰에서 ‘집권할 경우 자본이득세를 폐지할 의향이 있는지’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캐나다인들은 지나친 세금부담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유당 내부에서도 반발기류

트뤼도 총리가 임기를 채운다면 차기 총선은 2025년 10월에 열린다. 하지만 이번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조기 총선이 실시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그만큼 트뤼도 총리는 이번 예산안에 공을 들였다.

문제는 캐나다 하원의 의석수다. 자유당은 전체 338석 가운데 160석밖에 안된다. 그동안 트뤼도 총리는 신민당의 협조를 얻어 국정을 운영했다. 실제 이번 예산안에도 장기요양프로그램 확충 등 신민당이 요구한 항목을 대폭 반영했다. 그러나 신민당은 예산안 발표 이후 일주일 가까이 찬성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신민당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트뤼도 총리의 예산안은 부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트뤼도 총리는 “일부 야당이 공정성에 반대하는 투표를 계획하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이미 119석의 제1야당인 보수당과 퀘벡블록당(32석)은 예산안 처리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자유당 내부에서도 부정적 기류가 있다. 빌 모르노 전 재무장관은 “자본이득세가 캐나다의 투자를 위축시켜 경제성장을 방해할 것”이라며 반대 목소리를 내 트뤼도 총리를 곤혹스럽게 했다. 모르노 전 장관은 트뤼도 내각 초기인 2015~2020년 사이 연방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이 때문에 이번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해도 트뤼도 총리의 리더십에는 당분간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김용호 언론인 캐나다 토론토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