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디지털반독점법과 네카라쿠배

2023-08-29 11:01:56 게재
한국 대표기업이자 주식 시가총액 세계 21위권인 삼성전자가 갑질을 당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상대는 시총 규모가 비슷한 브로드컴이란 회사다. 세계 3대 반도체 설계기업 중 하나다. 브로드컴의 무기는 휴대폰에 필요한 네트워킹·무선통신과 관련된 통신칩이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브로드컴이 거의 유일한 생산자였다. 이 독점시장에 미국의 무선통신기업인 퀄컴이 도전장을 냈다. 그러자 브로드컴은 퀄컴의 시장진입을 막기 위해 삼성전자에 '노예계약서'를 내민다. 2021년부터 3년간 브로드컴 부품을 매년 7억6000만달러(약 1조60억원) 이상 구매하고, 실제 구매액이 못 미치면 차액을 브로드컴에 배상하는 계약이다. 말도 안되는 계약이지만 휴대폰 제조를 유지하려면 감내해야 했다.

굴지의 삼성전자가 그 수모를 겪고서도 아무 말도 못했다. 오히려 공정거래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한 회사는 퀄컴이었다. 브로드컴의 행위를 공정거래법으로 제재하려면 '독과점 지위'(시장지배적 지위)가 우선 인정돼야 한다. 1개 사업자가 시장의 50%를 점유하거나 상위 3개사가 75% 이상 장악해야 한다. 브로드컴이 생산하는 '네트워킹 통신칩'을 독자 시장으로 보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휴대폰에 들어가는 다른 네트워킹 관련 부품도 같은 시장으로 본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조사에 착수한 공정위가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한 이유다. 우여곡절 끝에 공정위가 조사 착수 4년여 만인 내달 6일 제재 여부를 결정내릴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끝이 아니다. 또 이 '시장획정'을 놓고 법원에서 지리한 법정싸움을 벌여야 한다.

IT와 플랫폼시장의 변화속도는 제조업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빠르다. 브로드컴의 휴대폰 통신칩만 하더라도 공정위 조사가 길어지면서 이미 다각화의 길을 걷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IT기업의 경우 규모와 이용자수 등을 따져 독점적 지위를 갖는 기업을 미리 확정하고 반독점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 세계 추세다. 유럽연합(EU)이 '디지털시장법(DMA)' 시행을 서두르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반면 우리 정부는 지난해부터 세칭 '플랫폼(디지털)반독점법'을 추진하다가 최근 흐지부지되는 모양새다. 국내 플랫폼대형업체들이 강력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국내 플랫폼 시장은 이미 글로벌IT의 각축장으로 바뀌고 있다. 언제까지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의 세상일 수 없다. 이들이 곧 '브로드컴 앞의 삼성전자'가 될 수 있다. 그때에서야 "우리에겐 왜 디지털반독점법이 없느냐"고 땅을 쳐도 소용없다. 디지털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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