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역사와의 대화'에 빠진 대통령

2023-09-11 11:07:31 게재
역대 대통령은 임기말이 되면 '역사와의 대화'에 몰두하곤 했다. 국정지지도가 바닥을 치고 여당에게조차 외면당하는 고립무원 처지가 되면 "지금은 다들 나를 비판하지만 훗날 역사는 나를 제대로 평가해줄 것이다.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고 소신대로 국정을 마무리하겠다"는 논리를 내세워 자기를 합리화했다. 임기 말 대통령은 국민은 외면한 채 자기 뜻대로 질주하기 일쑤라는 얘기다.

임기 2년차 윤석열 대통령을 바라보는 민심이 싸늘하다. 한국갤럽 조사(5∼7일, 이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지지도는 33%였다. 집권초 '반짝 50%대'를 기록한 이후 20∼30%대에 갇혀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임기초 고난을 겪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비슷한 수준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부정평가가 60%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국민 10명 중 6명은 윤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해 "잘못한다"고 평가한다. 낙제점을 준 이유로는 '원전 오염수 방류'(16%) '외교'(12%) '경제·민생·물가'(10%) '독단적·일방적'(7%) '소통 미흡'(6%) 등이 꼽혔다.

국민은 윤 대통령의 국정기조에 불만이 크다. 경제·민생을 구하기 위해 앞장서는 대신 뜬금없이 '이념전쟁'에 나선 것, 한미일 밀착외교를 위해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외면한 것, 야권·시민사회·노조·언론을 향해 '싸울 수밖에 없다'고 선전포고한 것 등등. 국민은 윤 대통령에게 이같은 국정기조를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답은 엉뚱하다. 윤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 흉상' 논란을 놓고 여권조차 '참전'을 주저하자, 참모들에게 "차라리 얘기 안 꺼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한다 … 잘못된 것을 가만히 놔두는 것이 옳으냐.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면 (윤석열정부가) 하겠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총선에서 지더라도, 지지율이 1%로 떨어지더라도 할 일은 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소신은 높게 평가할만 하다. 하지만 국민 반응은 냉담하다. 윤 대통령의 소신이 바라보는 방향이 틀렸다고 국정지지도 지표로 말한다.

임기가 3년 넘게 남은 대통령이 벌써부터 국민 대신 역사와의 대화에 심취한다면 그 결과는 국민과 대통령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국민은 윤 대통령이 국민의 바람을 수용해 국정기조를 바꾼다면 그 결단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촛불민심의 호통을 듣자 내각을 문책하고 국민 앞에 사과했다. 구호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국정기조를 '친서민 중도실용주의'로 바꿨다. 10%대까지 추락했던 이 전 대통령 지지도는 40%대로 올라섰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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