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국적선사 출혈경쟁 보고만 있나

2023-10-19 11:06:23 게재
"죽어가는 HMM을 혈세로 살렸더니 이제 다른 국적선사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독자노선 깔고…." 선사에서 화물영업을 담당하는 한 인사는 최근 동남아항로를 강화한 HMM을 성토했다.

HMM은 지난 9일 부산에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수라바야를 직항으로 연결하는 서비스를 개설했다. 선박 6척을 투입한 이 서비스는 인도네시아 노선과 베트남·태국 노선을 교차운항한다. 10일부터는 필리핀항로 기항지에 다롄 텐진 닝보 등 중국항만을 추가하면서 투입선박을 1척 더했다. HMM이 아시아역내 항로를 강화하면서 국내 선사들끼리 경쟁이 생사를 건 '치킨게임'으로 변하고 있다.

아시아 역내항로는 국내 컨테이너선사들의 주력 시장이다. 이곳에는 고려해운 남성해운 동영해운 동진상선 두우해운 범주해운 장금상선 천경해운 태영상선 팬오션 한성라인 흥아라인 등 12개 선사가 운항하고 있다.

물론 대양을 항해하는 HMM과 SM상선도 이곳에서 서비스를 한다. HMM은 북미와 유럽항로를 주력으로 하지만 아시아역내에도 14개 항로에 12척을 운항한다. 항로보다 투입선박이 적은 것은 다른 선사들과 선복공유 등 협력을 하기 때문이다.

정부도 K-얼라이언스, 한국해운연합 등 다양한 형태로 선사들의 협력노력을 지원했다. 2017년 한진해운이 파산한 이후 국내 선사들끼리 출혈경쟁으로 국내 해운력을 갉아먹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형성됐다.

하지만 출혈경쟁은 다시 시작됐고, 빈 배를 운항할 수 없는 선사들이 벌이는 치킨게임을 정부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며 한숨짓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 중견선사 관계자는 "HMM이 국적선사들의 동남아 서비스네트워크를 활용해 미주나 유럽으로 가는 원양항로 화물을 처리하던 상호협력 관계를 깼다"며 "HMM이 단위 원가가 저렴한 대형선박을 투입해 저가운임으로 아시아 역내화물을 집화하면 원가 이하의 운임으로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국적선사들에게는 치명적인 악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운협회에 따르면 아시아 역내시장은 MSC 머스크 등 세계 1위부터 45위까지의 선사들 모두가 경쟁하는 곳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HMM을 포함한 국적선사들 선박을 모두 합쳐도 MSC가 가진 선복의 1/3도 안되는 상황"이라며 "누군가는 망하고 살아남은 선사들 중심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암담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선혈 낭자한 레드오션에서 살아보겠다고 바둥대는 국적선사들에게 공정거래법 위반이라고 으르는 대신 잠들어 있는 'K-얼라이언스'가 작동할 유인책 마련을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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