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⑮ 미국 외교가에 등장한 최초의 조선 여성들

화성돈 외교가 관심을 한몸에 받다

2023-12-08 11:27:52 게재
한종수 한국 헤리티지연구소 학술이사

1888년 1월부터 미국 조선 공사관에 근무하던 참찬관 이완용과 번역관 이채연 부인은 미국 땅을 처음 밟은 조선 여성들이다. 이들이 초대 공사 박정양을 모시고 부임할 당시만 해도 부인을 동반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개월이 지난 4월 21일 참찬관 이완용, 번역관 이채연, 진사 이헌용, 노자 허용업은 병을 이유로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는 부부 동반으로 귀임한다.

유교 교육을 받고 자란 조선 여성이 전통 복식인 한복을 입고 미국에 도착했으나 이들은 유창한 영어와 세련된 매너로 어느 나라 부인들과도 뒤지지 않는 활동을 펼친다. 당시 조선 공사관 동정을 소개한 포트워스 신문(Fort Worth Daily Gazette)은 "조선 여성들이 전통 복식을 입고 최초 도미(渡美) 했다"는 기사를 작성했다.

미국 땅에 첫번째 발을 밟은 두 명의 조선 여인들이,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향하고 있다. 이들은 워싱턴의 조선공사에서 일하는 외교관 부인들이다. 알려지기로는 상당한 미인이며 전통 의상을 착용할 예정이어서 사교계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한국여성으로는 최초로 미국 땅을 밟은 이완용 부인(사진 왼쪽)과 이채연 부인


참찬관 이완용 부인보다 번역관으로 부임했다가 서기관으로 승진한 이채연 부인인 성주 배씨(星州 裵氏)에 관한 관심이 외교가에서 뜨거웠다. 성주 배씨는 배맹진(裴孟振)의 딸로 전 부인 인동 장씨(仁東 張氏)가 1877년 자식 없이 죽자 후처로 들어왔다. '광주 이씨(廣州 李氏) 족보'에는 이채연과 성주 배씨 사이에는 이상필(李相弼)과 이상범(李相範) 형제를 둔 것으로 나온다.

이채연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제중원(濟衆院)에서 일하면서부터였다. 그는 188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제중원 주사로 근무했는데, 영어를 학습한 후 '외아문'(지금의 외교부)에서 1년 정도 영어를 익힌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887년 미국 주재 공사관원 번역관으로 임명돼 파견된다. 당시 같이 미국으로 파견된 서기관 이하영(李夏榮)도 제중원 주사였던 것을 보면, 제중원에서 알렌(Horace N. Allen)과 쌓은 친분이 이채연의 미국 파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일시 귀국했다가 미국으로 돌아온 참찬관 이완용과 서기관 이채연 부부는 1889년 2월 26일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3시간가량 파티를 개최한다. 이들이 돌아오기 직전인 1월 13일 새로 이사해 문을 연 아이오서클(Iowa circle) 조선공사관 입주 기념 파티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이완용 부인과 이채연 부인의 워싱턴 DC 사교계 등장은 꽤 많은 관심을 모아 1000여명이 조선공사관 입주 기념 파티에 참석했다. 특히 '은둔의 나라'에서 온 조선의 작은 여성들이 개최한 기념 파티에 대해 '조선의 외부세계로의 등장(COREA'S COMING-OUT)'이란 기사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영문 'Ye Washon'으로 적혀 있는 니화손 묘비 앞면(사진 좌)과 '조션 니화손'으로 적혀 있는 뒷면


조선의 이 작은 여성들은 미국의 환영회가 익숙한 듯이 침착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들의 적응력은 매우 눈에 띄었으며 새로운 세상의 관습에 자연스럽게, 그리고 우아하게 진입하였다. 이완용 부인은 길고 쭉뻗은 짙은 파란색의 치마와 창백한 노란색 실크의 헐렁한 상의를 함께 입었다. 이채연 부인의 가운은 분홍색 실크였고 비슷한 스타일의 옷차림이었다. 부인들의 빛나는 검정 머리는 매우 부드러웠으며 머리 뒤쪽의 끝에는 무거운 매듭을 달았다.

이완용 부인은 매우 예뻤으며 친절한 성모마리아와 같은 모습에 그녀의 미소는 매우 매혹적이었다. 그녀의 혈색은 아이보리색을 띄었고, 얼굴은 섬세하고 정상적인 모습에 여린 얼굴 윤곽을 보였다. 그녀는 매우 똑똑했고 영어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직감으로 칭찬을 알아듣고는 땡큐를 적합한 순간에 말할 수 있었다.

부인들은 이 행사를 즐기는 듯이 보였고 여성의 인권이 전혀 없는 곳에서 온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편안해 보였다. 이완용 부인과 이채연 부인은 자신들이 가진 자유의 축복을 감상하는 듯이 보였다. 이 부인들의 남편들도 그녀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즐거워하는 듯이 보였다.


서기관 이채연이 이하영 이완용에 이어 미국에서 서리 공사로 1890년부터 1893년까지 재임할 당시, 성주 배씨 사이에서 1890년 10월 12일 아들을 출산한다. 이 출산 소식은 현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조선인 최초 미국 출생' 사실을 강조하며 화성돈(華盛頓, Washington)'을 음차해 '화성돈의 자식(孫)'이라는 의미로 영어로는 'Ye Washon', 국문으로는 '니화손'이라 지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니화손은 태어난 지 두달 닷새 만에 '에그즈마(Egzma)'라는 염증성 피부병으로 사망해 당시 공사관 건물 주인인 세스 펠프스(Seth L. Phelps)의 가족묘지에 묻힌다. 세스 펠프스의 사위 세블론 브라운(Sevellon Brown)은 당시 미 국무부 차관이자, 공사관 매입 시 계약 당사자였다. 그 가족묘지에 '조선의 첫 외교관 자녀'가 묻히게 된 것이다.

또 이들은 아이오아 서클 인근 교회에도 다녔다는 신문기사가 전해진다. 조선에서 다닐 수 없던 교회를 워싱턴에 파견된 조선의 외교관들이 다니는 모습이 신문기자에게 포착된 것이다. 1889년 4월 21일 일요일 당시 미국 해리슨 대통령(1889~1903)이 참석한 언약교회(the church of the covenant) 예배에서는 해리슨 대통령보다 조선의 외교관들이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국 대통령이 그 어떤 워싱턴에 있는 사람보다 대중의 관심을 덜 끈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지난 일요일(1889년 4월 21일)은 예외였다. 언약의 교회에 대통령은 의자에 앉았고 중간의 한 부분이 비어있어 이미 예약된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대통령이 착석하고 대통령 영부인 맥키 여사가 앉은 후, N st. 쪽에서 일행이 도착했는데, 그 빈부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 공사의 이하영씨 이상재씨 강진희씨였고 한명의 통역사(서기관 이채연)와 이름이 거의 기억되기 힘든 두명(이완용 부인과 이채연 부인)의 공사관 부인이었다.

이 부인들은 교회 예배에 한번도 와 본적이 없었지만 예약된 좌석으로 향했다. 이 부인들은 매우 조그만 했고, 다양한 색깔의 조선 의상을 입었으며, 약간 높이 올린 비단 모자와 술(tassels)로 장식하고, 매우 길고 풍성하며 허리춤이 상체를 다 덮고 겨드랑이까지 올라오는 치마를 입었다.

예배에서 나오는 한마디도 알아 듣지 못할지라도, 예배 시간 동안 그들은 매우 경의롭게 집중하고 있었으며, 최고 판사를 비롯한 모든 청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예배가 끝났을 때 그들은 들어왔던 문으로 품위있게 빠져 나갔고, 여성들은 그들을 태우러 온 차로 향할 때, 그들의 긴 치마를 우아하게 치켜 들었다. 조선에서는 어떤 여인도 대중 앞에 나타나서는 안된다.


참고자료
1. 광주이씨(廣州李氏) 족보
2. 이민식, 〈석거 이채연(1861~1900)〉, 《근대한미관계사》(2017)
3. Fort Worth daily gazette, The Commission bill (1889.2.7.)
4. Pittsburg dispatch, COREA'S COMING-OUT (1889.2.27.)

["한미관계 141년 비사"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