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곱씹을수록 씁쓸한 '혜자 도시락'

2023-12-14 11:21:00 게재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비율) 좋은 먹거리가 인기다. 그중 으뜸은 GS25 '혜자로운 알찬한끼 모듬'이다. 6주 만에 80만개 넘게 팔렸다. GS25 김밥류 역사상 최단기간 기록이다. 도시락 용기에 주먹밥 김밥 등을 담았다. 크기는 다이어리(일기장)만 하다. 3000원이 채 안된다. 2030세대가 주로 맥주와 함께 사 먹는다. 나이불문, 등산객도 많이 찾는다. 대체불가 가성비 편의점 도시락인 셈이다.

겉만 보고 '왜 잘 팔렸을까'라는 의문은 접는 게 좋다. 바로 답을 얻을 수 있다. '혜자'가 들어간 이름에서 단초를 얻는다. 십수년만 해도 '혜자'는 유명배우 이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2010년 GS25 '김혜자 도시락'이 나오면서부터 극적 반전을 시작한다. 당시 편의점 도시락은 대부분 과대포장, 부실한 내용물로 악명 높았다.

김혜자 배우 이름을 앞세운 이 도시락은 입소문을 타고 '마더 혜레사(혜자+테레사)'로 칭송받는다. 저렴한 가격은 기본, 맛뿐아니라 튼실한 반찬에 두 팔 벌려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의점 도시락계 'BTS(방탄소년단)'나 다름없었다.

비싸고 맛없다는 편의점 도시락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김혜자 도시락→ 혜자 = 가성비가 좋다'라는 의미로 널리 쓰였다. 물론 국어사전에는 없지만, 은혜롭다는 뜻을 가진 한자어감을 더해 '혜자롭다'라는 형용사로까지 통한다.

편의점 도시락 하나에 이렇게까지 '장광설'을 늘어 놓은 이유는 간명하다. '혜자 도시락이 왜 지금 인구에 다시 회자할까'라는 궁금증이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대침체기'로 접어들었던 2010년 경제상황이 지금과 여러모로 닮았기 때문이다. 고물가 고금리 불황에 금융기관 탐욕 소득양극화 등이 그랬다. 최악으로 치닫는 경제상황을 '혜자 도시락'이 반증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다.

중산층 이하 실질소득이 줄고 있는 점도 마찬가지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올 1분기 가구당 월평균 실질소득은 1년 전에 견줘 제자리걸음을 했다. 소득은 늘었지만 높은 물가 탓에 가구 구매력에 변화가 없었다. 고소득 가구(소득 상위 40% 이상)를 뺀 나머지 가구 실질소득은 감소했다. 1분위(소득 하위 20%) 가구 실질소득은 한해 전보다 1.5%, 2분위 2.4%, 3분위는 2.1% 각각 줄었다. 중산층을 포함하는 3분위(소득 상위 40~60%) 가구당 실질소득은 지난해 3분기부터 세분기 연속 줄었다. '혜자 도시락'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단 얘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도시락은 곱씹을 수록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되레 지금이 그때보다 더 많이 찾는 것 같아 갑갑할 정도다. '혜자 알찬한끼 모듬' 도시락을 시원한 맥주와 함께 사가는 사람이 괜히 많은 게 아닌 듯 싶다.
고병수 기자 byng8@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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