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명사 문화여행 | 인터뷰 완주 소병진 지역명사

일제강점기 때 명맥 끊긴 전주장 복원 … 공예미술관 건립 꿈

2023-12-21 10:55:40 게재

15~20년 동안 나무 자연 건조, 틀어지지 않는 가구 제작 비결 … 나무 만지면 부드러움과 따스함 느낄 수 있어 누구나 좋아해

한국관광공사는 지역의 명사를 관광자원화하는 '지역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을 진행하고 있다. 지역명사와 지역관광을 연계해 매력적인 지역관광 콘텐츠를 개발하려는 취지다. 관광객들은 그들이 전문성을 가진 다양한 영역에 대한 설명을 듣고 체험을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전문성을 갖추기까지 좌절 고민 성공 등 삶에 대해 들으며 공감할 수 있다. 올해 지역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은 7개 전담여행사를 선정해 관광상품 개발과 홍보를 진행했다. 2022년 대비 300% 이상 여행객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라북도 완주의 소병진 명사를 만났다.
16일 전북 완주 소병진전주장전수교육관에서 소병진 명사가 도면을 보는 모습. 사진 이의종


14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3 공예트렌드페어'에서는 소병진 명사(70)의 작품 '다시, 전주장'이 전시돼 있었다. 대한민국 명장 가구제작 1호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소목장 보유자인 소 명사는 전통공예의 활성화를 위한 정부 사업에 참여해 그가 복원한 전주장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다시, 전주장' 앞에 머무는 모습이었다.

이날 오후 행사장 인근 한 카페에서 소 명사를 만나 그의 작품과 삶에 대해 들었다. 59년째 가구를 제작하는 그는 여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가구 장인으로서 노력을 말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삶과 가구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처음 어떻게 가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나.

1965년부터 일을 배웠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못했다. 어른들이 '기술만 있으면 먹고 산다'고 했다.

우리 집안이 목수 집안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조선 헌종 때 토목을 관장하던 선공감(繕工監)을 지냈다. 목수들의 지휘자였다. 그 내림으로 집안에 대목장 등 목수들이 많다. 마침 8촌 형이 전주에서 유명한 공방인 전주 중앙가구점을 했고 아버지를 통해 공방에 들어갔다.

그땐 일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무보수로 일을 하며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워야 했다.

남들은 10년 배우는 것을 2년 6개월 만에 익혔다. 그때 '신동'이라는 얘기를 듣고 공방의 대표주자가 됐다. 18세쯤 전라북도에 청소년 기능경기대회가 생겼는데 참여해 메달을 땄다.

소병진전주장전수교육관에 전시돼 있는 전주장. 사진 이의종


■소질이 있었나보다.

소질과 노력 등 모든 박자가 맞았다. 옛날부터 우리 집안이 목수 집안이었으니까 그 영향이 있었다. 그리고 환경이 좋았다. 모든 일이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데 전주 중앙가구점은 서울에 견줘도 뒤지지 않는 공방이었다. 기술자 5명이 모두 전주 최고의 기술자들이었다.

기술은 평생을 해도 다 못 익힌다. 지금도 끊임없이 배운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배울 것이 있다는 것처럼 정말 그렇다. 항상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구해야 한다.

■전주장은 어떻게 복원하게 됐나.

전북이 소도시다 보니 서울에서 기술자를 영입했다. 그때 기술자들은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을 선불로 받고 공방을 옮겼는데 그런 방식으로 모셨다.

그때 전북에 목수가 50여명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부르더니 '나이는 어리지만 일을 제일 잘 한다. 장래가 촉망된다'면서 '서울로 가라'고 말했다. 그 덕에 서울로 왔다.

당시 인사동에 있던 동일가구가 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공방으로 직원만 500명이었는데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노동법을 철저하게 지켰다. 하루에 8시간 주5일 근무했다. 그러니 주말에 인사동을 둘러보면서 가구들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주장'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고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 매겨 있는 가구를 보게 됐다. 조선시대 것으로 150년 정도 됐다고 했다. 본 적이 없는 가구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로 명맥이 완전히 끊긴 것이다.

그래서 다시 찾아가 '전주 사람으로 동일가구에 있다'고 하면서 '우리 조상들이 만든 것으로 앞으로 내가 복원하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가구를 내줬다. 흑백 사진만 있고 카메라를 비싸서 못 사던 시절, 카메라를 빌려 전주장 곳곳을 사진 찍고 정확한 치수를 쟀다.

그렇게 시작해 20년 가까이 전주장을 복원했다. 전주장 복원을 인정받아 나이 40세에 대한민국 최연소로 명장이 되고 이름을 건 공방을 차렸다. 이후엔 국가무형문화재가 됐다.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도 수상했다.

대패질하는 소병진 명사의 손. 사진 이의종


■복원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작품인가, 상품인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상품을 만들면 돈을 번다. 싸구려 가구들을 많이 제작하는 거다. 그러나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 가구가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가구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가구 가격이 상품에 비해 많이 비싸진다.

가구를 위해 나무 준비를 하는 데만 15~20년이 걸린다. 나무를 준비해서 건조하는 과정이다. 그렇다 보니 아내가 먹고 사는 걸 전담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

■가구의 재료가 되는 나무는 어떻게 준비하나.

나무를 파는 목상들이 있다. 겨울이 오면 목상들이 나무를 팔러 온다. 수입 나무는 일절 쓰지 않고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나무들만 쓴다. 참죽나무 느티나무 오동나무 돌베나무 벚나무 등을 사용한다. 지금은 많이 귀해졌다.

나무들을 사면 자연에서 눈 비를 맞게 둔다. 일부러 나무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그러다 보면 나무의 진이 다 빠져 나온다. 나무에서 진이 빠져 나오지 않으면 나중에 가구가 틀어진다.

큰 나무 기둥을 보면 속이 비어 있다. 그런 나무에서 좋은 무늬가 나온다. 나무의 무늬를 살려 가구를 제작하는 것이 기술이다.

느티나무에서 용의 눈을 닮은 무늬 '용목'을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신성한 나무라는 의미다. 가구를 잘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의 무늬를 발견하는 눈도 중요하다.

사실, 짜맞춤은 쉬운데 재료 구입이 제일 어렵다. 돈이 있어도 다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좋은 나무를 만나야 한다. 목수가 좋은 나무를 만나는 것은 복이다.

■소병진전주장전수교육관을 방문하면 어떤 체험을 할 수 있나.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들을 준비하고 있다. 초등학생부터 일반인들까지 누구나 방문해 2~3시간 정도 즐길 수 있다. 가구를 어떻게 제작하며 나무를 어떻게 건조하는지, 사용하는 연장 등을 보여주고 전주장의 명맥을 일제가 끊은 얘기 등 가구의 역사에 대해 직접 설명해준다. 일제강점기 때 전주장은 물론 가구 제작 방식, 연장 등이 다 일제 방식으로 바뀌었다. 전주장 복원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하면 다들 호응을 한다.

이어 쟁반을 만드는 등 체험을 하게 된다. 나무를 직접 만지면서 사포질을 하고 기름을 발라보는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처음 하는 체험이지만 누구나 굉장히 좋아한다. 나무를 만지면 나무가 부드럽고 따스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미술관과 전수관을 건립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 중이다. 제작한 가구들, 사용하는 연장 등을 망라해서 공예미술관을 건립하고자 한다. 또한 미술관과 별도로 전수관을 건립해 전주장 제작을 가르치고 체험의 장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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