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와 지정학, 글로벌 인터넷 배관 재편

2023-12-22 10:49:01 게재

영국 이코노미스트 "해저 데이터케이블, 경제적·전략적 자산으로 전환"

영국과 에스토니아 핀란드 해군이 이달 초 발트해에서 합동훈련을 실시했다. 군사적 목적이 아니었다. 해저 데이터케이블을 사보타주(고의파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올해 10월 이 지역의 해저케이블이 잇따라 의문의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1만9000㎞ 규모 'SEA-ME-WE 6' 케이블. 사업자선정 입찰에서 중국 화웨이 자회사 HMN이 더 낮은 입찰가를 제시했으나 미국이 자국기업 서브콤을 최종 사업자로 관철시켰다. 출처:서브머린케이블네트웍스


글로벌 인터넷의 배관이지만 그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해저 케이블이 최근 주요한 경제적, 전략적 자산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아마존과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거대 기술기업이 해저 케이블 사업의 큰손으로 부상했다. 또 미국과 중국 간 긴장 고조로 전세계 디지털 인프라가 분열될 위험이 커졌다"며 2가지 흐름을 짚었다.

해저케이블은 대륙 간 인터넷 트래픽의 약 99%를 전송한다. 리서치기업 '텔레지오그래피'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 550개의 해저 케이블이 운영 중이거나 계획돼 있다. 길이는 140만㎞가 넘는다. 일반적으로 12~16개의 광섬유가닥으로 묶인 각각의 케이블은 평균 수심 3600미터의 해저를 가로지른다. 전체 용량 중 지난 10년 간 설치된 용량이 절반에 달한다. 최신 해저케이블은 초당 250테라비트의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다. 10분 안팎의 동영상 130만개에 해당하는 양이다.

텔레지오그래피는 2019년 이후 글로벌 인터넷 대역폭 수요가 초당 3800테라비트 이상으로 3배 증가했다고 추산한다. '데이터 먹는 하마'인 인공지능(AI)의 붐은 이러한 추세를 강화할 전망이다. 데이터기업 '시너지리서치그룹'은 향후 6년 대형 클라우드 제공업체의 데이터센터 용량이 약 3배 증가할 것으로 예측한다. 2025년까지 44만㎞의 해저케이블이 새로 설치될 예정이다.

이는 빅테크가 가져온 큰 변화 중 하나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해저케이블은 주로 음성트래픽을 전송하는 데 사용됐다. 영국 BT와 프랑스 오랑쥬(옛 프랑스텔레콤) 등 통신사업자가 대부분의 용량을 통제했다. 2010년 데이터트래픽이 증가하면서 인터넷·클라우드컴퓨팅 대기업인 아마존과 구글, 메타, MS가 해저케이블을 임차하기 시작했다. 아마존 등 4개 기업의 글로벌 해저케이블 사용비중은 2012년 10% 정도였지만 현재는 3/4에 육박한다.

데이터 수요가 급증하자 기술기업들은 거액을 투자해 자체적으로 해저케이블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구글이 가장 공격적이다. 사용중인 26개 케이블 중 12개를 직접 소유하고 있다. 올해에는 북미 동부해안에서 브라질을 거쳐 아르헨티나까지 이르는 길이 1만4000㎞, 사업비 3억6000만달러 규모의 해저케이블 '피르미나'를 완공했다. 메타는 1개의 해저케이블을 소유하고 있으며 14개 케이블에 투자하고 있다. MS는 4개, 아마존은 1개의 해저케이블을 부분 소유하고 있다. 향후 4년 간 전세계적으로 약 120억달러가 해저케이블 사업에 투자될 전망인데, 이 중 4개 기술기업 비중이 약 5분의 1에 달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통신사로부터 데이터 대역폭을 대량으로 구매했던 이들 기술 대기업은 이제 일부 케이블 용량을 반대로 통신사업자에게 임대하고 있다. 기존 통신사들은 더 많은 용량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끊임없는 압력에 직면했지만, 빅테크와 달리 자본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미중 기술경쟁도 해저케이블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 미국 서부해안에서 홍콩에 이르는 길이 1만3000㎞ 규모 '태평양 광케이블 네트워크(PLCN)'는 2016년 구글과 메타의 투자로 시작됐다. 2020년에는 필리핀과 대만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확장됐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지난해 '중국이 미국인 데이터를 탈취할 수 있다'며 홍콩 구간에 대한 승인을 거부했다. 홍콩까지 연결된 수백㎞ 케이블이 해저에 방치된 상태다.

미국은 또 동남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1만9000㎞ 규모 'SEA-ME-WE 6' 케이블 사업에서 각종 개입과 방해를 시도한 끝에 중국사업자를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내일신문 2023년 3월 31일 21면 '미중 기술전쟁, 해저케이블 시장서 격화' 참고). 케이블 구축 사업자 선정에서 중국 화웨이 자회사 HMN이 더 낮은 입찰가를 제시했으나 인도와 싱가포르 등 투자자들을 어르고 달래며 자국기업 서브콤이 최종 사업자로 낙찰 받도록 했다.

중국은 독자노선을 구축하며 대응하고 있다. 케냐에서 파키스탄을 거쳐 프랑스를 연결하는 2만1500㎞ 해저케이블인 'PEACE'는 중국 기업들이 단독으로 건설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차이나텔레콤, 차이나유니콤, 차이나모바일 등 중국 통신사 3곳이 중국에서 시작해 싱가포르와 파키스탄 이집트를 경유해 프랑스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에 5억달러를 투자한다. HMN이 구축할 이 케이블은 미국의 방해로 무산된 SEA-ME-WE 6 케이블과 직접 경쟁하게 된다.

미중 경쟁이 심화되고 있지만 2019~2023년 양국을 오가는 정보량은 매년 20%씩 증가하는 추세다. 해저케이블에 의존하는 양국 모바일 사업자들은 상대영역을 잇는 네트워크를 계속 늘리고 있다. 하지만 그에 필요한 라이선스 확보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미중간 데이터 경로가 점차 우회하면서 비용도 커지고 있다"며 "양국간 긴장이 계속 고조된다면 언젠가는 그같은 경로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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