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정 가는 이스라엘 '집단학살'

2024-01-11 10:32:09 게재

지난해 12월 남아공이 제소 … 국제사법재판소(ICJ) 11~12일 첫 심리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논란이 이번 주 국제법정에 서게 된다. 지난해 12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집단학살(genocide)을 벌이고 있다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한 사건의 심리 일정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정파 하마스 간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10일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숨진 팔레스타인인 시신 옆에서 여성들이 흐느끼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1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알자지라 방송 등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ICJ가 11~12일 이 사건의 첫 심리를 시작할 예정이며, 이르면 몇 주 내에 전쟁행위 중단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1948년 유엔에서 채택된 '집단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 위반 혐의로 이스라엘이 재판을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협약에서는 집단학살을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로 행해진 행위'로 규정한다.

남아공은 지난해 12월 29일 ICJ에 제출한 84쪽 분량의 소장에서 △민간인 특히 어린이를 대량 살해한 행위 △팔레스타인인을 대량으로 추방 및 이주시키고 집을 파괴한 행위 △팔레스타인인을 집단적으로 처벌해야 할 인간 이하의 존재로 묘사한 일부 이스라엘 관리들의 선동적인 발언이 모두 집단학살에 해당하며 고의성이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소장에서는 이스라엘 '집단학살 의도'를 보여주는 증거라면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각료들을 비롯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쏟아낸 강경 발언을 8쪽에 걸쳐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재판부가 이스라엘에 전쟁을 멈추라는 임시 조치를 명령해 달라고 요구했다.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팔레스타인 주민 권리가 더는 극심하고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필요한 조처"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해 약 1200명의 민간인과 군인, 외국인을 학살하고 240여명을 납치해 인질로 삼았다. 이에 이스라엘은 하마스 말살을 공언하며 반격에 나섰다. 현재까지 가자지구에선만 인구의 1%가 넘는 2만3000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고 주민의 90% 가량이 난민으로 전락해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사망자 대다수는 미성년자와 여성이라는 게 팔레스타인 측 주장이다.

이스라엘은 남아공의 제소에 강하게 반발하는 한편 재판을 통해 결백함을 밝히겠다는 입장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실제로 집단학살을 저지른 건 하마스라고 주장하고,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민간인 피해 최소화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남아공과 우리를 비방하는 여타 국가들은 정작 시리아와 예멘 등지에서 수백만이 죽고 난민이 됐을 때는 어디에 있었는지 묻고 싶다"고 꼬집었다.

이츠하크 헤르조그 대통령 역시 "이보다 더 잔혹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은 없다"면서 "실제로 우리의 적인 하마스는 그들의 헌장에서 유대 민족의 유일한 민족 국가인 이스라엘 국가의 파괴와 전멸을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상당수 국제법 전문가들은 ICJ가 남아공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스라엘에 전쟁 중단을 명령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영국 출신의 국제법 전문가 대니얼 매코버는 수년이 걸리는 본안 판결과 달리 수주 내에 결론이 나는 일종의 가처분인 임시조치 명령을 끌어내는 건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인권 변호사 프랜시스 보일도 언론 인터뷰에서 "(남아공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모든 집단학살 행위를 멈추라는 명령을 받아낼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다만 ICJ 명령에는 강제성이 없는 데다 이스라엘이 따를지도 미지수다. 이스라엘이 불복한다면 ICJ의 권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ICJ는 2022년 3월 16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도 '군사작전을 즉시 중단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무시된 바 있다.

이스라엘은 특히 ICJ 재판부 구성원 일부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불복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재 ICJ 재판부는 미국, 러시아, 중국, 슬로바키아, 모로코, 레바논, 인도, 프랑스, 소말리아, 자메이카, 일본, 독일, 호주, 우간다, 브라질 등 15개국 출신 판사로 구성돼 있고, 내달 4명이 임기만료로 교체된다. 임기 9년의 판사 15명에 소송 당사국인 이스라엘과 남아공 출신의 임시판사가 각각 한 명씩 추가돼 전체 17명으로 재판을 진행하게 된다. 11일 열리는 첫 심리에서 남아공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변호인단이 열띤 공방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영국 변호사 말콤 쇼를 영입했고, 남아공은 국제법 전문교수인 존 듀가드가 팀을 이끈다고 알자지라가 전했다.

ICJ 최종 판결까지는 수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이며 ICJ의 모든 판결은 최종적이며 항소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하더라도 ICJ가 임시명령에서 남아공 손을 들어준다면 이스라엘을 지지해 온 미국과 서방 국가들에 상당한 부담이 될 전망이다.

지난 9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장관이 의회에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국제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을 "우려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최근 중동을 순방하던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관련 질문을 받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평화 노력을 방해한다. 가치 없다"고 평가절하한 것도 이런 기류를 사전 차단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정재철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