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대체 용산으로 왜 옮겼습니까"

2024-01-29 11:16:48 게재
박근혜 청와대 '출입기자'였다. 청와대 '출입기자'였지만 사실 청와대를 출입할 일은 거의 없었다. 기자들을 대표해 취재하는 풀(pool)기자일 때만 몇 달에 한번 출입이 가능했다. 기자들은 춘추관(청와대 밖에 있는 기자실)에만 머물렀다. 기자들 사이에서 "우리는 춘추관 '출입기자'"라는 자조가 떠돌았다.

청와대는 말그대로 구중궁궐이었다. 대통령은 고사하고 말단 행정관 만나기도 어려웠다. '출입기자'가 그랬으니 국민은 오죽했을까. 대통령과 국민 사이 소통은 가뭄에 콩나듯 했다. 대통령은 잊을 만하면 "너희(국민)를 만나주겠다"고 선심을 베풀었다. 임기 중 기자회견은 고작 5번. 그래서 '불통 대통령'이란 낙인이 찍혔다.

대통령선거 시절 윤석열 후보가 '제왕적 대통령 청산'을 내걸고 청와대 이전을 꺼냈을 때 긴가민가했다. 구중궁궐 청와대를 경험한 입장에선 대통령이 청와대를 벗어나면 국민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물론 공간만 옮긴다고 해서 무조건 소통이 잘 될까 의문도 들었다.

윤 대통령이 용산에 둥지를 틀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출근길 도어스테핑을 했을 때 기자로서 가벼운 흥분마저 느낀 게 사실이다. 1년에 한 번 하기 힘들었던 '대통령과의 질의응답'을 매일 아침 생중계로 지켜보다니.

청와대 밖 춘추관에 머물며 "구중궁궐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던 수년 전 기억이 떠올라 씁쓸했지만 새삼 "세상은 진일보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 흥분과 확신은 오래가지 않았다. 2022년 8월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이 첫 기자회견이자 마지막 회견이 됐다. 도어스테핑은 그해 11월 18일까지 61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 날 이후 윤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하지 않았다. 물론 곧잘 생중계에 등장해 '말씀자료'를 읽었지만 그건 소통이라 할 수 없다.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만 했지, 국민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올해 신년기자회견을 또 건너뛴다고 한다. 김건희 여사를 향한 국민의 궁금증을 피하려는 고육책으로 읽힌다. '약속대련 인터뷰'가 아니면 하지 않을 태세다.

도어스테핑으로 찰나의 흥분을 안겼던 윤 대통령이 역대 최악의 '불통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있다. 청와대 이전에 깊숙이 관여했던 여권 인사조차 "청와대 이전은 윤 대통령의 최대 업적이다. 그런데 그 업적이 빛나려면 도어스테핑을 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 안하면 청와대를 나온 이유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기자도 묻고 싶다. "이럴거면 대체 용산으로 왜 옮겼습니까."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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