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하는 농심, 세계 선거판도 뒤흔든다

2024-02-14 00:00:00 게재

블룸버그통신 “농업, 돈·식량·기후변화 둘러싼 문화전쟁의 핵심 전장 됐다”

13일(현지시각) 인도 펀자브주 농민들이 농작물 최저가 보장제 입법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전세계적으로 농업이 주요 전쟁터로 변하고 있다. 프랑스 등에서 농민들의 집단행동은 오랜 역사가 있지만 최근 상황은 유럽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게다가 올해는 유럽연합(EU)과 인도, 미국 등 수십개국에서 선거가 예정돼 있어 정치적 위험이 고조되는 시기다. 농심의 폭발에 따른 잠재적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블룸버그통신은 13일 “권력자들은 농민들을 길들이려 하고, 도널드 트럼프부터 유럽 극우단체에 이르기까지 반대자들은 농민들의 분노를 이용하려 한다”며 “이는 광범위한 문화전쟁의 최신 충돌지점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경제·사회적 전환의 속도와 관련돼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달 26일 파리에 몰려든 농기계 행렬은 최근 불만을 표출한 하나의 사례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벨기에 브뤼셀의 EU 기관 인근 도로를 수십대의 트랙터로 가득 메운 농부들이 정상회담을 위해 모인 EU 지도자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스위스 루마니아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폴란드 농부들은 이웃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는 곡물에 반대하는 데 앞장서며 정부를 협상테이블로 다시 끌어냈다. 독일에서는 지난달 경유보조금 삭감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일주일 동안 고속도로를 봉쇄했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수천명이 운집했다.미국에서는 농부들이 대기업 때문에 농산물 가격폭락이 벌어지고 있다며 불평한다.

수억명 소규모 농가로부터 식량을 의존하는 인도에서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현금과 보조금으로 이들을 달래려 한다. 하지만 13일 농민시위로 수도가 폐쇄됐고 오는 16일엔 농민과 노동조합 여성단체 학생들이 전국적인 파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파리정치대 글로벌 식량정치학 겸임교수인 크리스 헤가돈은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식량생산과 식단으로 전환해야 하는 까다롭지만 필수적인 과정을 헤쳐나가야 하는 정부에게 농민들은 중대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전직 미국 외교관인 헤가돈은 “전기자동차와 휴대폰 없이 살 수 있지만 농부와 그들이 생산하는 식량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덧붙였다.

각국은 다급히 나섰다. EU는 온실가스 배출량의 1/10 이상을 차지하는 농업에 대한 주요 환경정책 일부를 포기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농업계와 만나며 불만을 청취하고 있다. 유럽 최대 농산물 생산국인 프랑스에서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농부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약속하는가 하면, EU-중남미의 무역협상을 반대하고 나섰다.

최근 선거는 선례를 남겼다. 뉴질랜드에서는 농민친화적인 국민당의 새 정부가 세계 최초의 농장 배출세 부과 정책을 2030년까지 연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네덜란드에서는 질소 오염을 억제하려는 계획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극우 자유당 지도자 게르트 빌더스가 지난해 선거에서 깜짝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브라질에서는 농민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정권을 잃었다. 하지만 브라질 농업계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의 환경의제를 무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농업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서비스업과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다. 농업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EU에서는 2% 미만, 미국에서는 1%에 불과하다. 하지만 식량공급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물가가 유권자들의 주요 걱정거리로 남아 있는 시대에 농업계의 주장은 더 큰 공감을 받고 있다. 기후변화가 농작물에 타격을 주고, 전쟁으로 수출길이 막히고, 각국이 무역장벽을 세우는 상황에서 인구 증가에 따른 적절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농민 불안 편승하는 정치인들

미국 농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온 트럼프는 다시 한번 미국의 문화적 불화를 이용하려 하고 있다. 그는 미국 최대 옥수수 생산지인 아이오와주 후보지명대회에서 승리했다. 후보가 공식적으로 결정되는 전당대회는 낙농업 거점인 위스콘신에서 열릴 예정이다.

8년 전 위스콘신주의 지지로 트럼프는 대통령직을 확정지었다. 1984년 이후 중서부주에서 승리한 최초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다. 하지만 트럼프는 4년 전 위스콘신과 백악관을 바이든에게 잃었다. 트럼프가 올해 말 워싱턴으로 돌아가려면 다시 한번 농촌 지역사회의 대대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농민들 사이에서는 불안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현재 농가소득은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이지만 옥수수와 대두 우유 돼지고기 등 모든 품목가격이 최근 최고치에서 급락하면서 2006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할 전망이다.

전기자동차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려는 바이든행정부의 정책은 바이오연료에 사용되는 작물재배 농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바이든 대통령이 농장 기반의 재생가능한 액체연료로 기후변화에 맞서 싸울 기회를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호응하듯 트럼프는 기본적으로 ‘전기차는 사기’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핵심쟁점은 지원금

미국과 유럽 농부들은 관료주의와 비용 상승으로 인해 과도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년 동안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유럽 농업정책 명예교수인 앨런 매튜스에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최근 수년간 EU 농민들은 비용상승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 수준의 소득을 누렸다.

유럽연합은 2014년부터 농가를 지원하기 위한 위기 관련 조치에 25억유로(27억달러)를 지출했다. 2023~2027년엔 EU 공동예산의 약 1/3에 해당하는 2700억유로를 대규모 농업기금에 배정했다. 실제로 공동농업정책(CAP)은 EU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지출이었다. 하지만 최근 수년 동안 친환경 요건과 기금을 연계하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인도에서도 핵심 쟁점은 돈이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4월 총선을 앞두고 농업계 불만을 주시하고 있다. 2020년과 2021년 인도 수도권 델리지역 대부분을 마비시킨 농민시위로 모디 총리는 농산물시장 개혁을 철회해야 했다. 인도 농업계는 높은 부채, 농가 대출, 가격변동성, 기후변화로 인한 농작물 피해 등 수년간 지속된 문제들로 신음하고 있다.

인도 농민단체들은 다시 거리에 나섰다. 13일 인도정부와 농민단체들은 대출탕감 및 작물가격 보장 입법을 놓고 협의를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다. 수도로 진입하는 주요 도로가 봉쇄됐다.

인도 농민단체 ‘자이 키산 안돌란’ 회장인 아빅 사하는 “더 이상 약속은 필요없고 이제 행동이 필요하다”며 “농작물 최저가 보장에 관한 법이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친환경 의제에 소외감 느껴

유럽 농민들의 불안을 부추긴 것은 탄소중립을 위해 고안된 EU의 그린딜 법안이다. 이 정책에는 더 많은 유기농업과 동물복지 개선을 위한 과제가 포함된다. 일부 농부들은 친환경 정책으로 수확량이 감소해 소득이 줄어들고, 생활비 위기에 놓인 소비자에게 비용을 전가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극우정당들이 이를 이용하고 있다. 피렌체 유럽대학연구소의 비교정치학 교수인 사이먼 힉스에 따르면 농업계는 이주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민을 놓고 민족주의정당들과 의견을 달리했지만 녹색정책에 대한 반대에서는 일치하는 상황이다.

유럽외교관계위원회 보고서의 공동저자이기도 한 힉스 교수에 따르면 오는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반EU 포퓰리즘 정당이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는 9개국에 달한다. 마린 르펜의 극우정당 ‘국민전선’이 있는 프랑스도 포함된다.

농민들에 편승한 또 다른 민족주의자는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원조를 비롯한 각종 사안에서 EU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오르반 총리의 정치적 기반인 부다페스트 소재 대학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콜레기움(MCC)’은 지난달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 농민들의 모임을 조직해 집단시위를 시작했다.

MCC 브뤼셀 지부 전무이사 프랑크 푸레디는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농민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구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궁극적인 목표는 규칙을 바꾸도록 EU에 압력을 가하는 범유럽적인 대응”이라고 말했다.

사회학자이기도 한 푸레디는 “브뤼셀의 일부 사람들은 ‘친환경 의제가 식량을 생산하는 농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농사를 덜 짓는 것이 환경에 도움이 된다, 유럽에서 농사를 덜 지었으면 좋겠다는 인상을 준다”고 꼬집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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