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나가줄 테니 보상금 내놓으시오”

2024-04-05 13:00:17 게재

캐나다, 주택공급 부족에 세입자-집주인 갈등 증가 … 월세 안 내고 버티다 보상금 요구

주택시장에는 집주인이 있고 세입자가 있다. 세입자와 집주인 사이에는 언제든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얼핏 생각하면 집주인은 상대적으로 재정 형편이 나은 편이고, 세입자는 경제적 약자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 캐나다에는 이민자 유입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 집값이 큰 폭으로 올라 주택임대를 둘러싼 분쟁이 늘고 있다. 수년 사이 월세는 30~40% 가량 올랐는데 이마저도 물건이 많지 않다. 집주인은 기존 세입자를 내보내고 다른 세입자를 받아 월세를 더 올리기 원하지만 기존 세입자는 이사를 거부한다. 이런 갈등을 해결해야 할 법적 제도적 장치의 공정성에 대한 불만도 함께 커지는 상황이다.

월세 안 내는 세입자들

월세를 내지 않고 버티던 세입자가 나간 뒤 엉망으로 변한 마흐무드씨의 집 내부모습.
최근 캐나다공영방송 CBC는 세입자 문제로 골치를 앓은 자히드 마흐무드씨의 사연을 소개했다. 그는 2021년 토론토 근교의 소도시 오샤와에 집을 샀는데, 세를 놓아 월세 수입으로 자녀들의 교육비를 충당하고 저축도 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세입자는 2022년 5월 이사를 들어와 1년쯤 지나자 갑자기 월세를 내지 않았다. 2023년 8월, 마흐무드씨는 월세 미납에 따라 임대계약을 종료하겠다며 세입자들에게 퇴거통지서를 보냈다. 또한 주택 관련 분쟁해결기구인 ‘임대인 및 세입자 위원회(LTB)’에 조정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청문회 기일을 잡는 데만 몇달이나 걸렸으며, LTB는 최근 집주인과 세입자 양측의 의견을 청취한 뒤 임대차 계약을 해지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세입자는 그동안 2만4000캐나다달러(약 2400만원, 이하 달러)의 월세를 미납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흐무드씨는 세입자들이 집을 나간 뒤 충격을 받았다. 집안은 온갖 쓰레기 더미와 술병, 사람과 애완동물의 배설물 때문에 엉망진창이었다. 고통을 겪은 마흐무드씨는 최근 온라인 청원을 시작했다. 온타리오 주정부를 향해 세입자가 월세를 내지 않을 경우 빠르게 퇴거시킬 수 있도록 관련 법 개정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비슷한 경험을 한 부동산임대업자 크리스토퍼 시프씨는 “LTB가 제 역할을 못해 세입자 퇴거와 관련한 청문회 기일을 잡는 데만 몇개월씩 걸린다. 그 결과 많은 집주인들은 심각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하다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고 주장했다.

2022~2023년 온타리오주 LTB에는 월세 미납에 따른 세입자 퇴거 요구가 3만7000건 이상 접수됐다. 이는 전체 주택 관련 분쟁의 절반을 차지한다. 접수된 분쟁조정 신청 가운데 50일 안에 청문일정이 잡힌 것은 고작 7%에 그쳤다. 대부분 최종 결정까지는 수개월에서 최대 2년까지 걸렸다.

캐나다 동부 온타리오주 집주인들은 태평양 연안의 브리티시 콜롬비아(BC)주와 같은 임대법 개정을 요구한다. BC주는 퇴거통지서 내용에 이의가 없으면 청문회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세입자에게 퇴거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돼 있다. 예를 들어 BC주에서는 세입자가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은 경우 집주인은 임대차 계약을 종료하기 위해 10일 전에 통지할 수 있으며, 이때 세입자는 5일 이내에 임대료를 내거나 주택임대분쟁조정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시프씨는 “온타리오의 월세 분쟁 가운데 대부분은 청문회에 회부될 필요조차 없는 경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사보상금 요구하는 사례 늘어

지난해 9월 기준 토론토의 1베드룸 아파트 월세는 2540달러(약 250만원)였다. 이는 1년 전인 2022년 9월과 비교해 21.5% 올랐다. 같은 기간 2베드룸은 3350달러로 27%나 상승했다. 월세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지만 온타리오주 세입자법은 집주인이 연간 올릴 수 있는 월세 상승분을 제한한다. 주정부는 2022년의 경우 월세 인상률을 1.2%로 제한했고, 2023년에도 2.5%만 올릴 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다.

집주인의 입장에서 기준금리가 오르면 집을 살 때 받은 대출이자가 오르는데, 렌트비 인상은 시장 가격을 반영하지 못할 정도로 제한을 받으니 속이 터질 수밖에 없다. 이런 집주인의 속사정을 이용해 한몫 챙기려는 세입자도 있다. 이른바 ‘이사보상금(Cash for Keys)’이다. 세입자가 집을 비워주는 조건으로 집주인에게 현금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경제매체 BNN 블룸버그에 따르면 집주인들이 이자율 인상 등 재정적 압박에 직면하면서 ‘이사보상금’ 사례가 더 자주 목격되고 있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지난해에만 이런 사례를 세차례 경험했다”면서 “1만달러(약 1000만원)에서 많게는 3만달러까지 이사 보상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이는 세입자가 내는 월세의 6개월~1년치 임대료에 해당한다. 관련 법에 따르면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1~2개월치의 월세를 보상금으로 주고 이사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관련 법은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중개인은 집주인이 2000달러 보상액을 제안했는데, 세입자가 2만5000달러를 요구하며 버텼다고 전했다. CTV뉴스도 최근 “세입자들이 이사를 거부하고 분쟁조정위원회까지 8~12개월을 기다리는 시간을 현금을 받아내기 위한 교섭 도구로 이사보상금을 악용하는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부동산중개인은 CTV와 인터뷰에서 “집주인은 그런 상황에 몰리면 분쟁조정위원회까지 기다릴 것인지 세입자를 보상금으로 설득할 것인지 선택할 수밖에 없다. 현재 토론토의 대부분 집주인들은 현금을 주고 내보낸다”고 말했다. 최악의 경우는 집주인이 부동산을 팔려고 할 때 세입자가 이사를 거부하면서 구매자가 계약을 포기하고 떠나는 사례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CTV는 또 “오타와에서는 집주인이 집을 팔려고 할 때, 세입자에게 현금 1만달러와 이사트럭 비용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세입자가 거부한 사례도 있다”고 소개했다.

세입자들이 버티는 이유

다른 부동산중개인은 “집주인으로부터 아무리 많은 돈을 보상으로 받더라도 세입자 입장에서 그것은 횡재가 아니다. 이사를 나가면 집을 다시 구해야 하고, 그곳에도 역시나 많은 월세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세입자들은 가능하면 이사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월세를 체납한 세입자를 빨리 내보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집주인들의 요구가 주목을 받지만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온타리오주 세입자법률자문센터의 변호사인 로버트 패터슨씨는 “집주인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도입될 경우 나쁜 집주인들에 악용될 소지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퇴거를 더 쉽게 만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세입자가 적어도 주택문제에 있어서 약자라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론토의 세입자 옹호단체 관계자도 “세입자를 불법적으로 내보낸 집주인 가운데 처벌받은 사례는 13명 중 4명뿐”이라며 “공공기관이 철저하게 집주인 편”이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이 단체 관계자는 “세입자가 불법적으로 퇴거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오히려 법적 보호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면서 “집주인이 월세를 받기 위해 부동산을 구입했다면 그것은 투자로 봐야 하며, 세입자가 경제적 상황 때문에 월세를 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집주인이 감당해야 할 사업상 위험 부담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했다.

정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저스틴 트뤼도 연방총리는 최근 새 회계연도 예산안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세입자 보호를 강화하는 조치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연방정부와 각 주정부가 공동으로 국가표준임대계약제도를 도입하며, 세입자가 임대료를 협상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집주인이 아파트 월세 산정내역을 공개하도록 강제하는 내용을 담을 예정이다. 특히 젊은 세입자들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치에는 강제퇴거를 당한 세입자들을 보호하는 법률단체에 1500만달러의 예산을 지원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집권 자유당의 이런 조치에 대해 야당인 보수당은 “문제해결에 큰 도움이 안되는 보여주기식 정책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차라리 임대주택 공급을 늘려 분쟁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공격했다. 임대부동산업 운영협회도 “세입자 보호를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월세 산정에는 각종 세금과 이자율, 공공요금 인상 등이 반영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며 불량세입자에 대한 규제조치도 적절하게 취할 수 있어야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용호 언론인 캐나다 토론토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