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도서관 역사를 찾아서│ ⑤ 작은도서관운동

협동조합에서 좋은 책 함께 읽고 토론

2022-03-10 10:26:05 게재

유신 말기 "대화 오가는 시대적 사랑방" … 노동도서원·주민도서실로 이어져

"본 조합은 양서를 적정한 가격으로 구입·보급하고 지역사회 개발사업을 통해 부산 지방의 문화 향상을 도모하며 조합원 상호 간의 협동과 신뢰에 기초한 민주적 경영방식을 익히고 나아가 경제적 민주주의와 협동주의에 입각한 참다운 자주, 자립적 경제 질서의 전 사회적 확산을 그 목적으로 한다."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 정관 중)

부산 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이 운영한 협동서점 모습. 사진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유신체제 말기인 1978년 4월 부산에서 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양협)이 창립됐다. 양협은 좋은 책을, 소비자 주권운동인 협동조합 형태로 판매하고 함께 읽고 토론하며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활동을 제공했다. 나아가 이는 민주화운동가들이 대중들과 책을 매개로 합법적으로 만날 수 있는 민주화운동 조직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양협은 부산뿐 아니라 서울 마산 대구 울산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창립됐다.

◆회원끼리 책을 돌려보다 = 부산 양협은 보수동 책방골목에 협동서점을 열고 운영을 시작했다.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고 출자액에 관계없이 1인 1표의 권리를 가졌다. 조합원은 매달 의무적으로 1000원 이상 출자를 해야 했고 1명의 출자 총액은 1/10 이상을 넘지 않도록 했다. 조합원이 되면 매달 2권 이상의 책을 구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정관 해설, 운영 방법은 물론, 협동조합운동의 원리, 역사 등을 교육했다.

또 조합원이 소장한 책 중 책 2권 이상을 조합에 기증하게 해 이 책을 정가의 1/10에서 1/5 정도의 금액을 받고 빌려주기도 했다.

최진욱 한국도서관사연구회 운영위원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벤자민 프랭클린은 '준토'란 독서클럽을 통해 미국 독립의 필요성을 퍼트렸으며 준토는 회원제 도서관인 '필라델피아 도서관조합'으로 발전했다"면서 "양협도 회원들끼리 책을 모으고 돌려보면서 민주화 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고 말했다.

◆이후 도서관운동에 역할 = 이는 문화적 욕구,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던 시민들을 중심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 창립 당시 107명으로 시작한 조합원 수는 1979년 9월 기준 501명에 달했으며 출자금은 500만원이 넘었다. 도서 판매액은 1276만여원을 기록했다. 조합원 수가 늘어나면서 부산 양협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팸플릿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홍보했다.

독서주간을 맞이해 문학평론가 초청 강연회를 여는 등 시기마다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조합원들은 도서문제연구모임, 농촌문제연구모임, 시사문제연구모임 등 각종 사회문제 관련 연구모임에서부터 사진반 연극반 꽃꽂이반 등 여러 문화프로그램에서 활동했다. '기억과 전망' 2004 가을호는 부산 양협의 인기와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양서를 전문적으로 취급한다는 소문이 적지 않게 퍼졌고 당시 암울했던 시대에 그래도 의미가 있는 대화가 오가는 시대적인 사랑방 역할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 양협은 부마항쟁과 관련해 강제 해산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전국 대부분의 양협들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해체됐으며 이후 나타나는 도서관운동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최 운영위원은 "87년 6월 항쟁 이후 부산에서는 부산 양협 조합원이었던 이들이 노동도서원 설립을 주도했고 마산 양협의 후신인 마산 책사랑은 90년대 창원지역 마을도서관 설립을 이끌었다"면서 "서울 양협의 한 분과였던 어린이도서연구회는 90년대 이후 어린이 독서문화운동을 이끌면서 어린이 도서관 설립 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양협은 1960년대 마을문고 운동과 함께 지금의 작은도서관을 만들어낸 기반"이라고 강조했다.

◆문헌정보학과 학생들, 도서관 운영 =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노동도서원' '주민도서실' 등의 명칭을 가진 작은도서관들이 나타난다. 그 중 하나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영향으로 노동운동과 관련해 설립된 노동도서원이다. 노동도서원은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나 노동운동을 지원하면서 대부분 노동자로 구성된 회원들과 다양한 모임을 하고 문화활동을 지원했다. 야학 활동가들이 설립한 곳들도 있었다.

주민도서실은 당시 공공도서관들이 충분히 건립되지 않았고 주로 공부방 역할을 하는 가운데 지역주민들에게 독서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활동을 제공한 공간이었다. 서울 면목동 푸른소나무 도서대여실의 경우, 2만여권의 책을 갖췄고 3000원의 가입비만 내면 가족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청년모임 등 다양한 모임이 운영됐으며 노조 결성 등 지역운동이 이뤄지기도 했다.

주목할 만한 주민도서실 중 하나는 문헌정보학(당시 도서관학)을 공부한 학생들이 도서관운동의 하나로 시작한 서울 관악구 난곡주민도서실이다. 당시 학생들은 '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 '도서관은 살아있는 유기체' 등 문헌정보학자 랑가나단의 '도서관학 5법칙'을 운영에 적용했고 운영조직인 '새숲회'를 만들어 지역주민들과 함께했다. 난곡주민도서실은 설립 초기, 청년과 청소년들의 문화거점으로 역할을 했고 난곡새숲도서관으로 지금까지 이어진다.

["우리나라 도서관 역사를 찾아서" 연재기사]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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