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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규제·정책, 산업안전보건법 초심 탈선

2023-10-27 11:45:05 게재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

학술대회에서 만난 전 직장 후배와 대화중에 정부의 정책에 내가 다소 비판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현장의 사정을 마주한 뒤 정책과 괴리를 절감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여러 사고들의 다양한 직접 원인 위에는 그 배경이 되는 작업의 조건과 환경이 있고, 그 위에 기업의 경영 차원의 관심과 기여가 있으며, 그 끝에 정부의 규제와 정책이 있다.

이 구조를 뒤집어 생각하면 기존의 규제 방식과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최하위 수준의 우리나라 사고사망 만인율은 현 정부의 목표인 2026년 OECD 평균 수준 진입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성이 붙어있는 규제와 정책에 변화란 쉽지 않다.

산업안전보건 법규, 규범 형성 지향적

산업안전보건 법규는 형법 등 사회질서에 반하는 부적절한 행위를 억제하기 위해 처벌을 정한 법과는 달리 유익한 행위를 산업현장의 규범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 지향적 법규다. 따라서 법규의 내용이 하지 말아야 할 행위가 아닌, 해야 할 것들이고 이행하지 않은 것을 위반으로 한다.

형법 등은 법규의 내용이 사회적 상식이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어서 준수 의무자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법 집행의 전제이다. 하지만 산업안전보건 법규는 각기 다른 생산과정의 특정한 경우에, 또 해야 하는 특정한 행위를 규정하고 있어서 준수 의무자가 모른다는 것이 기본 전제다.

이런 맥락에서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은 정부가 사업주에게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행을 지원할 것을 다른 의무들에 우선해 법 제4조에 정하고 있다. 또 이 법은 기업과 정부의 재정적 현실을 고려해 근로자 수 50인 이상의 기업은 유자격 전문가를 직·간접적으로 선임해 정부의 책무로 되어있는 지도와 조언을 담당하도록 했다.

정부정책 따져야할 국감장, 민간인 불러 추궁

이와 같은 산안법의 초심을 기준으로 현재의 규제와 정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정부는 당연히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의 초심에서 상당히 탈선한 것으로 보인다.

법에 따르면 정부의 산업안전감독, 지도와 같은 행정자원은 전문인력의 손이 미치지 않는 50인 미만의 사업장에 대부분 투입해야 할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중대산업재해의 80%가 50인 미만의 기업 현장에서 발생되고 있다. 하지만 언론은 주로 대기업의 경우만 보도해 국민들의 착시를 조장한다. 국회 역시 정부의 규제와 정책을 따져야 할 국정감사장에 정부 관계자가 아닌 민간인을 증인으로 불러내어 사고발생의 책임을 추궁하기도 한다.

국회에서 민간인을 국감 증인으로 채택하는 경우는 국민을 위한 입법기관으로서 규제나 정책을 바로잡기 위해 피규제자의 입장을 듣기 위함이 아닐까. 정부의 규제와 정책의 탈선은 정작 피해 당사자들이 빠진 상태에서 나머지 관계자들 각자의 자기중심적 편익 추구의 산물인 것 같다.

정부 지도·감독의 효용성

기본적인 안전조치의 규범화를 위해 관련 정보와 방법을 전달하기 위한 정부의 지도·감독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효용은 대상에 따라 다르다. 정부의 지도·감독은 전문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기본적인 안전조치에 관해 잘 알지 못하고, 의지조차 부족한 50인 미만의 사업장에 우선돼야 할 행정수단이다.

전문인력이 배치된 사업장의 재해예방은 기업 자율에 맡기는 것이 타당하다. 정부는 그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자문을 제공하는 안전보건 시장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생산에 관한 세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법규 기준의 정부의 지도·감독은 사고발생에 기여하기도 한다. 이는 실제 발생된 중대재해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파급효과를 얻기 위해 사고가 발생된 소수 사업장에 국한하더라도 적발 건수 위주의 감독은 다른 기업들로 하여금 사고발생에 대비하기 위한 증빙서류 작성과 안전규칙에 매몰시켜 국가 전체 차원에서 중대재해 감소보다 증가에 기여하게 된다. 대규모 현장의 사고예방에 관한 정부 차원의 지도·감독은 이미 효용성 한계를 넘어섰다.

바둑계에 '철저하게 정석을 익혀라. 그리고 잊어라'라는 격언이 있다. 정석을 철저하게 익히지 않으면 바둑기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정석만으로는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안전 법규와 사고 예방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