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친일 콤플렉스'와 홍범도 흉상 철거

2023-09-06 15:03:15 게재

'홍범도 논란'이 뜨겁다. 발단은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종합강의동 충무관 앞에 있는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이회영 5인 독립투사의 흉상을 난데없이 철거하겠다고 밝힌 데서 비롯됐다. 광복회와 역사학계 등에서 강력히 반발하고 여론이 들끓자 당황해 내놓은 꼼수가 가장 '약한 고리'로 여겨지는 홍범도 장군을 분리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가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공산주의자라는 것이다. 또 학계에서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정'난 '자유시 참변'에 그가 관여했다는 의혹도 새삼 끄집어냈다.

항일투쟁하던 1920년대 공산당 입당 지금 잣대로 재선 안돼

홍범도 장군은 1890년대 말부터 20여년 동안 국내는 물론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를 누비며 일본군과 싸운 전설적 항일투사다. 1923년 봉오동전투와 그가 김좌진·이범석 장군과 힘을 합쳐 승리한 청산리전투는 번번이 당하기만 했던 우리 민족이 일본 정규군을 통쾌하게 섬멸한 찬연히 빛나는 투쟁사다.

홍 장군이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활약했던 1920년대 상황을 지금 잣대로 재단해선 안된다.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제국주의 관점에서 철저히 일본 편을 들었고 우리의 독립호소를 외면했다. 3·1운동 후 막연히 걸었던 기대가 절망으로 바뀐 상황에서 그나마 볼세비키혁명에 성공한 소련이 피압박민족에 관심을 기울이며 지원했다.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있던 이동휘에게 40만루블(나중에 20만루블 추가지원)이란 엄청난 자금을 지원한 것도 레닌이었다. 설사 그것이 공산세력 확산을 위해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활동을 지원하는 자금이었다 하더라도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적의 적'인 볼세비키 세력과의 협력은 항일독립투쟁의 한 방편이었다. 1921년 한인 독립군들이 소련군에 강제 무장해제당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빚어진 '자유시 참변'에 그가 관여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에 대한 '공산주의자 멍에'는 이전 정부에서 이미 검증해 걸러진 바 있다. 1962년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2015년 박근혜 대통령 시절 잠수함 '홍범도함' 명명식을 가졌으며, 그의 유해봉환은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꾸준히 추진해 2021년 문재인 대통령 때 성사됐다.

2018년 3·1절 99주년을 맞아 홍범도 등 5명의 흉상을 육사에 세운 것은 생도들이 선열의 뜨거운 애국심을 본받기 바라는 뜻이었을 터이다. 더 깊게는 우리군의 뿌리를 멀리는 항일의병에서 시작해 항일독립군 광복군의 무장투쟁에서 찾고자 함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을 위시해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그리고 독립투쟁에 앞장서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 흉상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멀쩡한 흉상들을 굳이 내치겠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왔을까. 한국군의 부끄러운 과거, 뿌리 깊은 '친일 콤플레스'가 작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신생독립국으로 출범해 한국전쟁까지 겪은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해방된 조국의 군대를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장악해 내리물림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부터 21대 이세호에 이르기까지 1948년부터 30년이 넘도록 역대 21명의 육군참모총장이 예외없이 일본군·만주군 출신이었다. 이런 '친일 콤플렉스'가 독립투사 흉상 건립을 명분상 반대하지는 못했지만 눈엣가시처럼 불편한 심정이었던 인사들이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친일행보와 '이념전쟁' 흐름에 편승해 거부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오염수 해양투기,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부정 비판 못해

독립투사들 흉상을 치워 일본에 잘 보이려 하는 것이라고까지는 단언하지 않겠다. 다만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 등 과거사문제 양보,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투기나 독도 망언, 간토(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일본 관방장관 망언에 항의 한마디 못하는 등 일본의 눈치를 살피는 정책기조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려다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게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고 한 윤 대통령 발언에 힘을 받았음인지 국방부와 육사는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흉상 철거를 밀어붙일 태세다. 그러나 이런 퇴행적 역사전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최근 빚어지는 '이념전쟁'을 보면서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