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커플? 독일 녹색당, 기업을 품다
FT "기업들과의 관계 크게 진전 … 총선 앞두고 책임 있는 집권세력 입증에 주력"
독일 녹색당 공동대표인 아날레나 베어보크는 올해 4월 녹색당 첫 총리 후보로 나서면서 열대우림이나 멸종위기 동물을 살리자고 말하는 대신 "독일 기업을 살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공언했다. 베어보크는 '기업과의 협약'을 통해 기후변화 과도기를 지날 독일 기업들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4일 "녹색당과 기업의 관계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녹색당 정치인들은 기업을 무시했고, 기업에 무시당했다"고 전했다. 독일 총선이 이달 26일(현지시각) 열린다. 베어보크는 기업 수장들을 연쇄적으로 만나며 고충과 민원을 듣고 있다. 그는 "미래의 시장은 기후중립적일 것"이라며 "이는 일어날지 말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이 상황을 가장 잘 이끌 것이냐의 문제다. 나는 독일 기업들이 최선두에 서길 원한다"고 말했다.
FT에 따르면 과거 대중의 기억에 각인된 녹색당 이미지는 핵발전소 앞에서 대중 선동적인 시위를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난 3년 간 많은 것이 변했다. 녹색당과 독일 기업들 모두 조심스럽게 기존의 입장을 바꾸고 있다. 적이 아닌, 동맹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보인다. 이는 믿을 수 있는 집권세력임을 보여주려는 녹색당의 핵심 홍보 지점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16년 동안의 재임기간을 마치는 때에 유럽 최대 경제국을 이끌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
'독일산업연맹' 이자벨 볼프그람은 "1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녹색당이 기업계와 정치권의 협약을 제안한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양자 간의 관계가 크게 변했다"고 말했다.
기후변화에 대한 소비자 우려가 높아진 것도 기업계가 녹색당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게다가 친환경, 사회적 책임 경영, 지배구조 개선 등 ESG 투자가 확대되면서 주주들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다. 녹색당 원내 부대표인 올리버 크리스처는 2017년 총선을 떠올렸다. 그는 "기업들에 전화하면 '지금은 찾아오지 마세요. 선거 끝나면 봅시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며 "이제는 그들의 약속을 일일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일부 기업들은 진짜 친환경적으로 변했을 것이고, 일부 기업들은 녹색당의 약진이라는 정치적 현실을 인정하는 것일 수 있다. 녹색당은 2017년 선거에서 8%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지금은 16~19%를 거머쥘 태세다. 물론 녹색당이 총리를 차지할 가능성은 적다. 이달 말 총선을 앞두고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3위를 달린다.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SPD)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이 1, 2위다.
하지만 녹색당이 차기 연립내각에 들어갈 가능성은 농후하다. 탄소배출 제로를 목표로 하는 기후중립성은 녹색당 어젠다 0순위다. 녹색당은 향후 10년 동안 친환경 인프라 구축에 5000억유로 지출하겠다는 청사진을 마련했다. 거기에 더해 베어보크 후보는 기업과의 협약을 선언했다. 친환경 지속가능한 사업모델로 전환하는 기업들에게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녹색당은 독일 헌법에 규정된 신규국채 발행에 대한 제한, 이른바 '부채한도'(debt brake)를 완화하는 방안을 모색중이다. 이는 기독민주당, 사회민주당과 갈등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총선 후 연립정당이 성사되려면 어느 정도 밀당과 타협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녹색당 중진 정치인들은 지난 여러달 총선을 준비하면서 수많은 기업의 최고경영자들, 경제학자들, 각주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장을 만났다. 녹색당이 이끄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재무장관인 다니엘 베야즈는 그 과정에서 녹색당의 목표를 기업의 이해타산과 맞물리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우리가 기업인들과 만나면서 배운 것은 기업들 역시 기후중립을 달성하고자 하는 강한 의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선 수익성도 있어야 한다. 이를 녹색당의 DNA와 사고방식에 녹여내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 정당으로서 독일 녹색당의 모델은 번영을 구가하는 남부지방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다. 이 지역은 독일 자동차산업의 심장으로 다임러와 포르셰, 보쉬의 본사가 있다. 녹색당 주정부가 들어선 첫번째 지역이기도 하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는 2차세계대전 이후 보수적인 기독민주당의 본거지였다. 하지만 녹색당이 2011년 권력을 잡았다. 행운이 따랐다. 바로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붕괴 사고였다. 지역주민들 사이에 핵발전에 대한 거부감이 거세졌다. 핵발전은 기독민주당이 오래 전부터 지지하던 에너지원이었다. 그리고 주정부를 녹색당에 빼앗겼다.
10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녹색당이 집권하고 있다. 이유 중 하나는 녹색당 출신 주정부 총리인 빈프리트 크레치만이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지역 방언을 구수하게 쓰는 삼촌 같은 이미지의 70대 정치인이다.
지역을 파고든 실용적 태도도 녹색당 집권을 지속시킨 요인이다. 40년 전 녹색당 창당회원이자 슈투트가르트 시장을 지낸 프리츠 쿤은 "기업을 더 잘 이해하자"며 녹색당을 독려한 인물이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인구 10명 중 1명은 자동차업계에서 일한다. 쿤은 환경과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화시킬 방법을 고민했다. 그래야 녹색당이 생존을 넘어 번영할 수 있다고 봤다.
쿤은 "적이라는 관점을 갖고선 상생의 사고를 할 수 없다. 적과는 싸워야 한다. 반면 동반자는 믿음과 확신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전국에 걸쳐 기업들과 만났다. 가족으로 구성된 중소기업 '미텔슈탄트'에서 지멘스와 폭스바겐 같은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두루 찾아갔다. 그는 2000년 '기후변화에 맞서지 않으면 기업들은 혁신 사이클에서 낙오할 것'이라는 녹색당 특유의 부정적 화법을 버렸다. 대신 '녹색 아이디어로 흑자를 내자'(Be in the black with Green ideas)는 긍정적 슬로건을 내세웠다. 많은 녹색당원들이 이를 차용했다. 지금은 가장 강력한 효과를 내는 슬로건이 됐다.
하지만 2011년 크레치만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총리로 임명된 과정은 험난했다. 다른 주들이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소재한 기업들의 불안감을 한껏 활용한 것이다. 크레치만의 전임 보좌관이자 현재 독일 상원에서 이 지역을 대표하는 루디 후그블리트는 "어떤 주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기업가들이여, 우리 주로 오는 게 낫다'는 내용의 신문 광고를 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크레치만이 독일 타블로이드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자동차는 더 줄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면서 한 메이저 자동차회사 CEO가 크레치만의 사무실로 쳐들어가 해명을 요구했다. 크레치만은 "내 요점이 와전됐다. 나의 관심사는 오직 탄소배출 제로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후그블리트는 "그 CEO는 '그럼 됐다. 내 목표도 탄소배출 제로'라고 말했다"며 "그 한마디로 둘은 갈등이 아닌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녹색당이 이끄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는 이후 수년 동안 자동차기업들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 차업계는 중국 소비자들의 왕성한 수요로 탄탄한 경영실적을 내고 있었다. 기업들은 크레치만과 약속한 지속가능성 목표를 향해 나아갈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녹색당 일각에선 '기업들이 스스로 변화하기란 어렵다. 그들을 움직이기 위해선 비용이 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연의 일치인듯, 그같은 값비싼 변화의 계기가 닥쳤다. 바로 독일 디젤게이트 스캔들이다. 2015년 9월 독일 자동차제조사들이 엔진을 조작해 탄소배출량을 속인 사실이 발각됐다. 이 여파로 독일 자동차업계는 친환경 전기차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자동차업계의 한 경영자는 "우리는 환경과 관련해 중대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대신 녹색당에게 '국가가 산업계를 지원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부가 엄격하게 규제하면 기업들은 탄소배출 정책이 느슨한 다른 나라로 공장을 옮길 것이고, 그러면 환경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고 말했다. 그는 "녹색당은 기업을 문제의 원인이 아닌, 해결책을 도출하기 위한 동반자로 보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2017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녹색당은 기업들과 전기차 생산을 확대하는 '전략적 대화'를 시작했다. 여기엔 자동차 제조사와 부품 공급업체뿐 아니라 학계와 시민사회도 동참했다.
후그블리트 의원은 "우리의 목표는 글로벌 탄소배출의 0.3%를 차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를 전세계 최고의 기후중립 지역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녹색당과 기업들이 성공적인 협력 모델을 만들어 그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산업 선도지역이 일관된 기후보호정책을 추구하면서도 실제 경제에 도움이 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보여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같은 취지에서 마련된 게 합작법인이다. 비용 절반은 주가 부담한다. 일례로 '포르셰'와 배터리 제조사 '커스텀셀스'와의 합작법인은 전기로 구동되는 레이싱카를 만드는 것이다. 이 스타트업의 CEO인 토르게 퇴네센은 "내 목표는 탄소배출을 줄이면서도 경쟁기업인 테슬라보다 더 오래 가고, 더 빨리 충전되는 배터리셀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에 대한 녹색당의 변화는 강경한 환경보호론 정당에서 부르주아 정당으로의 바뀐 것"이라며 "녹색당의 목표가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급진성을 버렸다.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인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생 청취 캠페인
당원들은 공동대표 베어보크와 로베르트 하벡이 녹색당을 주류정당 반열에 올려놓은 것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녹색당 당원은 지난 6개월 동안 10% 이상 늘어 현재 12만181명에 달한다.
2018년 녹색당 지도부가 선출된 뒤 시행한 첫번째 조치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재무장관인 다니엘 베야즈와 같은 재정·금융 전문가들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었다. 베야즈 장관은 정치 입문 전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일했다. 그는 여러 재정전문가들과 경제학자들을 당에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동시에 녹색당 공동대표들은 민생현장 탐방을 시작했다. 하벡 대표는 주정부 재무장관들과 중앙은행장들이 의견을, 베어보크는 기업과 산업계 지도자들의 의견을 두루 들었다. 그 결과 올해 4월 독일 경제주간지 '비르차프츠 보케'는 "최고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베어보크가 26%의 지지율로 가장 인기 있는 정당대표"라고 보도했다.
지멘스의 전 CEO인 조 케저는 녹색당 최근 컨퍼런스에서 "기업에 대한 녹색당의 태도 전환을 미심쩍어 하는 사람들도 기업과 관련한 당의 활동을 성공적이라고 인정한다"고 말했다. 전직 녹색당 정치인으로 현재 제약기업 바이엘의 로비스트로 활동하는 마티아스 베링거는 "베어보크는 기업 경영자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존경을 얻었다"며 "녹색당 지도부는 기업에 대해 말하는 것뿐 아니라 기업과 이야기하는 방식에서도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영자들의 우려는 여전하다. 녹색당이 기업의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는 탄소배출 규제와 부유세 제도를 도입할 것이라고 보는 경영자들이 많다. 베야즈 재무장관은 "환경 관련 추가적인 규제가 녹색당 정책의 중요한 측면임을 인정한다"며 "하지만 이는 기업의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기업계의 관성도 있다. 일부 기업 경영자들은 공개적으로 녹색당을 인정하는 데 머뭇거린다. 기독민주당, 자유민주당과의 오래된 인연 때문이다. 한 경영자는 "녹색당이 잘못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기업인들은 녹색당을 당파적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독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서서히 변하고 있다. 녹색당은 저소득 계층에선 여전히 고전하고 있지만, 기업계에서 녹색당 지지자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프리츠 쿤은 "기업들은 변하고 있다. 오늘날 기업계는 기독민주당보다 생태학적으로 더욱 의식적"이라고 말했다.
일부 비판가들은 '녹색당이 너무 내어주고 너무 적게 취하는 게 아닌가' 의아해 한다. 예를 들어 녹색당이 이끄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35% 이하다. 이웃하는 라인란트팔츠주나 보수 정당이 이끄는 바이에른주보다 더 낮다. 이에 대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녹색당은 '보수적인 연정 파트너 때문에, 다른 주들보다 핵발전 의존도가 크기 때문에 더 과감히 움직이는 데 고전했다'는 입장이다.
후그블리트 의원은 "우리는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FT는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우리가 인터뷰한 거의 모든 기업인들은 '중앙정부에서 녹색당을 보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베야즈 장관은 최근 모임을 회상했다. 한 업계 로비스트가 사무실로 쳐들어와 녹색당의 정책 아이디어를 항의했다. 베야즈는 그에게 "수년 동안 녹색당이 고수한 입장이었다. 왜 지금에서야 이렇게 항의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제 나는 녹색당을 진지하게 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베야즈는 "녹색당에 대한 반응은 때로 그것은 긍정적이고 때로 부정적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