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K-콘텐츠의 내일, 플랫폼 주권에 달렸다
최근 세계 각국의 MZ세대들은 K팝 아티스트들의 연습실과 드라마 촬영지,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 한국의 골목골목을 직접 걷는다. 세계인은 이제 상품이 아니라 이야기와 경험, 문화와 정체성을 소비하기 위해 한국을 직접 찾는다. 콘텐츠가 태어난 땅, K스토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을 직접 걸으며 그 문화적 원형을 체험하려는 것이다. 일종의 문명 발상지 순례다.
이 같은 흐름은 세계 팝 시장에서도 확인된다. 얼마 전 미국 LA의 한 대형 공연장에서는 수만 명의 관객을 열광시키며 글로벌 차트를 뒤흔든 팝그룹이 무대에 올랐다. 멤버들의 국적은 미국, 필리핀, 가나계 등 다양했고 노랫말은 영어였다. 하지만 이들을 발굴하고 트레이닝하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기획한 운영체제는 다름 아닌 한국의 콘텐츠 산업이었다. 국적과 언어를 넘어 한국형 제작 시스템이 세계 대중문화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움직이는 힘은 문화이며 그 확산의 방식과 영역도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고대 문명이 강을 따라 이동했다면 오늘날 문화는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확산된다. 콘텐츠와 정보, 소비와 경험이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촘촘하게 연결되는 시대다. 문화의 경쟁력은 플랫폼 경쟁력과 분리될 수 없다. 문제는 K콘텐츠가 신 문명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그 유통과 데이터, 추천 알고리즘의 상당 부분을 글로벌 플랫폼이 통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콘텐츠 강국이지만 플랫폼은 약한 한국
한국 콘텐츠 산업이 플랫폼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한 데에는 구조적 원인이 있다. 글로벌 제작 자본의 대규모 유입으로 중소 제작사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산업 양극화가 심화됐으며, 독자적 유통망 부족으로 국내 OTT는 여전히 글로벌 플랫폼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콘텐츠는 국내에서 생산되지만 IP, 데이터, 2차 사업화 권리의 상당 부분이 글로벌 플랫폼으로 귀속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대응해 주요국들은 일찌감치 플랫폼 질서 재편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영국은 경쟁관계에 있던 BBC와 ITV가 협력해 통합 스트리밍 플랫폼 브릿박스를 구축하며 자국 콘텐츠 유통 기반을 재정비했다. 호주는 글로벌 플랫폼과 콘텐츠 생산자 간 협상을 법제화하고 정당한 수익 보상 체계를 마련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콘텐츠 생산만이 아니라 콘텐츠가 유통되고 가치가 배분되는 제도를 국가 차원에서 치밀하게 설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에게 세 가지 핵심 과제를 제시한다. 첫째, 국내 플랫폼 기업의 전략적 협력을 전향적으로 유도하고 불필요한 규제를 완화해 글로벌 유통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제작 단계에서 원천 IP와 핵심 판권이 국내에 귀속될 수 있도록 정책 금융과 투자 구조를 보다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셋째, 웹툰·게임·음악으로 이어지는 K콘텐츠 확장 생태계를 유기적으로 관리해 산업 전반의 부가가치를 국내로 귀속시켜야 한다.
K콘텐츠 다음 승부는 플랫폼
한국은 콘텐츠 강국이 되었으나 플랫폼 주권은 아직 취약하다. K콘텐츠의 지속 가능성은 창작의 영역을 넘어 자국 생태계를 보호하는 제도의 힘에 달려 있다. 신 문명을 선도하는 K콘텐츠의 미래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누가 연결하고 그 규칙을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플랫폼 주권은 더 이상 산업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의 지속 가능성과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적 과제다.
동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