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전쟁, 에너지안보 개념 바꾼다
연료확보 넘어 ‘그리드·AI·배터리’ 중심 기술안보 개념 재편
석유 한방울보다 전력망 한줄이 중요 … 에너지시스템 변화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이 세계 에너지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언제나 에너지 전환을 앞당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가 급등·공급 불안 차원을 넘어 전력망(그리드)·핵심광물·배터리·인공지능(AI) 기반 전력운영 체계 등 ‘에너지 시스템 전환’을 촉발하고 있다는 평가다.
◆IEA “역사상 에너지 안보 최대 위기” =12일 에너지업계에 따르면 현재 진행 중인 미국-이란 전쟁은 에너지안보의 개념 자체를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석탄 석유 가스 같은 연료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전력망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지, 핵심광물 공급망을 누가 통제하는지, 배터리·스마트그리드·AI 기반 전력시스템 기술을 누가 선점하는지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실제로 미국-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글로벌 원유 공급의 약 20%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웃돌고 있으며, 두바이유와 브렌트유는 각각 169.8달러, 118.4달러까지 치솟기도 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를 “역사상 최대 수준의 에너지 안보 위기”로 평가한다.
시장 충격은 단순히 원유 가격에만 머물지 않았다. 데이터센터와 첨단 군사 시스템의 전력 의존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사이버 공격과 드론 공격이 전력망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그리드는 이제 국가 생존 인프라이자 군사 방어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배터리와 에너지저장장치(ESS)의 중요성도 급격히 커지고 있다. 전력망 안정성과 비상 전력 확보 능력이 국가 안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재생에너지 확대 역시 ‘탄소중립’보다 ‘안보’ 관점에서 접근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외부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 충격을 줄일 수 있는 에너지 체계의 중요성이 커졌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사무총장 사이먼 스틸은 “중동 전쟁은 각국 정부가 공급망 취약성을 줄이기 위해 재생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블룸버그통신 역시 “많은 국가가 국가안보와 경제 주권 회복 차원에서 청정에너지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에너지기술이 곧 국가경쟁력 = 무엇보다 이번 전쟁은 “에너지 공급 확대보다 에너지 절약과 효율개선이 우선돼야 한다”는 인식을 재소환했다.
공급 확대보다 수요 절감과 효율 향상이 우선적인 대응 수단이라는 판단이다.
이는 결국 배터리·AI·스마트그리드·고효율 전력기기 같은 기술 경쟁력 확보로 이어진다.
즉 ‘에너지 기술 = 군사 기술 = 국가 경쟁력’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앞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세계 에너지 질서에 거대한 충격을 줬다.
유럽은 러시아산 파이프라인가스(PNG) 공급 축소로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겪었고, LNG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가스 가격과 전력 가격이 폭등했고, 값싼 에너지 공급망이 언제든 붕괴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각인됐다.
이에 따라 유럽 각국은 공급망 다변화와 자국 생산 확대, 정치 리스크 축소에 나섰다.
특히 재생에너지는 더 이상 단순한 친환경 정책이 아니라, 에너지 자립과 국가 안보를 위한 전략 자산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에너지전환 앞당겨 = 전쟁이 에너지 체계를 바꾼 사례는 과거에도 반복됐다. 19세기 해전은 범선 중심 해군 체계를 석탄 기반 증기기관 체계로 전환시켰다. 영국 해군은 석탄 공급망 확보를 전략의 핵심으로 삼았고, 이 시기부터 에너지는 군사력과 산업력을 좌우하는 국가 전략 자산으로 부상했다.
1차 세계대전은 석탄 시대를 석유 시대로 바꾼 결정적 계기였다. 탱크와 항공기 등 내연기관 기반 무기가 등장하면서 석유확보 능력이 곧 전쟁 수행 능력이 됐다.
영국 해군이 주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면서 해상 패권의 기준도 바뀌었다. 이후 중동은 세계 에너지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석유는 단순한 연료를 넘어 국제 질서를 움직이는 ‘패권 자산’으로 자리잡았다.
2차 세계대전은 원자력 시대의 출발점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된 핵기술은 전후 원자력 발전으로 확산되며 에너지 밀도의 혁신을 가져왔다. 동시에 핵무기는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억지력으로 자리잡으며, 에너지 기술 자체가 국가 안보의 핵심이라는 개념을 확립시켰다.
결국 전쟁은 단순한 군사 충돌을 넘어, 에너지 체계와 산업 구조, 국제 질서를 재편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해왔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미국-이란 충돌은 그 흐름을 다시 한번 바꾸고 있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 공급 구조를 바꾸었고, 미국-이란 전쟁은 에너지 시스템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진단했다.
과거의 에너지 전환이 석탄→석유→가스처럼 ‘주력 연료’의 변화였다면, 이제는 전력망·재생에너지·저장장치·AI 기반 운영체계가 결합된 ‘에너지 시스템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