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석 칼럼
수포자가 왜 이렇게 당당한가
인문학 강좌 강사는 자신이 ‘수포자’라고 했다. 수학 포기자라는 말에 수강생 일부가 웃었다. 수강생 30명 가운데 50대 이상이 압도적이다. 강사는 과학책은 너무 어렵다고도 말했다. 인문학 강사가 무슨 취지로 그런 말을 했을까가 우선 궁금했다.
인문학 강의인데 왜 수학 이야기를. 수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문학은 재미있고 접근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나. 아니면 “철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을 하는 철학자도 수학 앞에서는 좌절을 느꼈다. 나도 특별하지 않다”는 신호를 발신한 건가.
어쨌거나 그의 말이 내게는 ‘수학 포기’라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나 하는 주제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다. 그 생각 때문인지 그의 인문학 강의가 이후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수포자’라는 유행어와 함께 살고 있다. 이 말은 이상하다.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나는 수포자다”라는 말에는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편안하다. 수학을 모르는 일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한국에 생겼다.
왜 수포자는 당당할까. ‘수포자’는 “나는 수학 바보다”라는 말이 아니다. 그 반대다. “수학을 못한다고 해서 내가 바보인 것은 아니다”라는 강한 뜻이 들어가 있다. 수학은 오랫동안 공부 머리 좋은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가르는 과목이었다. 그 결과, 수학에 실패한 사람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수학을 자기 밖으로 밀어냈다.
수학은 못하지만 글을 잘 쓰고, 사람을 잘 이해하며, 감성이 풍부한 ‘문과형 인간’으로 자신을 재정의 했다. 수학형 인간이 아닐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문과형 인간’이라는 말은 수포자가 집어든 새로운 안전한 신분증이다.
수학 없이도 살 수 있는 삶은 없다
‘수포자’라는 표현 자체도 절묘하다. “수학을 못 한다”가 아니라 “수학을 포기했다”는 거다. 못한다는 말에서는 수학이 잣대를 들고 나를 평가한다. 하지만 포기했다는 말에서는 내가 수학을 평가한다. 수학이 나를 탈락시키기에 앞서, 내가 수학을 버린 게 된다. 실패가 선택으로 바뀌고 한때 느꼈던 좌절감이 사라진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그 선택이 옳았다는 확실한 증거도 생긴다. 미적분을 쓰지 않고 직장에 잘 다니고 있고, 방정식을 풀지 않고도 월급이 따박따박 통장에 들어온다. 삼각함수를 몰라도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 만큼 결론은 간단하다. “그 어려운 걸 학교 다닐 때 왜 낑낑대고 배웠나. 살아보니 아무 쓸모도 없는데.” 학창 시절 수학이 누군가를 “당신은 수학을 못한다”라고 판정했다면, 이제는 그가 수학을 쓸모없는 지식이라고 판정한다. “나는 수포자”라는 말에는 학교 수학을 향한 뒤늦은 복수의 마음이 들어 있다.
성인이 된 우리에게 수학은 전문가에게 아웃소싱하면 되는 일이 된다. “어려운 수학은 내가 직접 애쓰지 않아도, 필요한 사람에게 맡기면 되는 전문기술”이라는 생각. ‘생활수학’과 ‘직관’ ‘감’으로 살아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당당한 수포자로 사는 길’은 그렇게 완성된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날까. 수포자는 ‘문과형 인간의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았다로 스토리가 완성될까.
과거에는 수학 없이도 별 문제 없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갈수록 수학으로 재조직되고 있다. 이 시대 성인의 삶을 둘러싼 건 온통 수학이다. 수학적 사고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삶이다.
대출이자, 감염병 확산 예측 등 수학이 아닌 게 없다. 계산은 전문가와 컴퓨터에 맡길 수 있지만 그 계산이 무얼 전제로 했는지와 그 결과를 믿어도 되는지를 대신 판단해 주지 않는다. 계산은 외주를 줄 수 있지만 최종판단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 계산을 맡기는 것과 판단권을 넘기는 건 다른 일이다.
수학적 무지는 교양의 결함과 등치
학교가 수학을 잘못 가르친 책임은 크다. 수학은 대학에 가기 위해 견뎌야 했던 과목이었고, 나를 다른 학생보다 아래에 놓은 잣대였다.
그렇다고 수학을 몰라도 되는 건 아니다. 수학 성적이 인간가치를 결정할 수 없다는 말과, 수학적 무지가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은 다르다. 우리는 두 문장을 슬쩍 이어 붙였을 뿐이다.
또 “나는 수포자”라는 말은 과거 실패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도 배우지 않겠다는 선언이 된다. 포기라는 말은 실패의 책임만 덜어준 게 아니라, 다시 배울 가능성의 창까지 닫아버린다.
수포자가 당당한 사회는 수학적 무지를 교양의 결함으로 여기지 않는 사회다. 수포자는 수학에서 해방됐다고 웃었지만 그가 내려놓은 건 숫자가 말하는 세계를 스스로 판단하는 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