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석 칼럼
췌장암 치료제 신약, 기립박수 받다
기립박수는 42초 동안 계속됐다. 미국 시카고 필드박물관 인근의 대형전시장. 미국임상종양학회(ASCO) 2026 행사장에서 췌장암 종양의학자 수백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수도 모자라 환호가 터졌고, 휘파람이 이어졌다. 단상 뒤 화면에는 췌장암 환자의 사망 위험을 기존 치료보다 60% 낮췄다는 그래프가 떠 있었다. 의사들을 일어서게 한 약물 이름은 ‘다락손라십’.
ASCO 연례행사는 매년 5월 말쯤 열린다. 세계의 종양학자 수만명이 몰려든다. 암은 인류를 가장 많이 죽이는 질병. 그래서 ASCO는 여느 학회가 아니다. 암 연구와 치료의 최전선을 확인하려는 의학자들의 열기가 폭발하는 곳이다. 한국에서도 서울대병원 종양 의사 등 많은 사람이 거의 매년 찾는다.
올해 ASCO의 주인공은 췌장암 신약 다락손라십이었다. 임상시험 결과를 발표한 연구책임자는 하버드대학교 브라이언 월핀 교수. 그는 ‘게임 체인저’ ‘패러다임 전환’과 같은 단어를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췌장암은 발견되는 순간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폐암 대장암은 다르다. 사망자 수는 많으나, 조기 진단법과 2세대 항암치료제, 3세대 항암치료제라는 무기가 쌓이고 있다. 의사들의 무기고에 신병기가 계속 입고되고 있다. 하지만 췌장암은 이들과는 동떨어진 세상이다. 췌담관 내과의사들과 종양내과 의사들 표정은 어둡다. 환자에게 싸우라고 건네줄 무기가 없다.
난공불락 췌장암에 균열을 내기까지
암 치료는 지난 수십 년간 신무기를 개발하는 데 놀랍도록 성공해 왔다. 예전에는 세포독성항암제만 있었다. 그냥 항암제라고 알려진 이 약은 빠르게 분열하는 정상세포에도 무차별 폭격을 퍼붓는다. 때문에 후유증이 크다. 탈모 구역질….
반면에 2세대 항암제인 표적치료제는 암세포 내부의 특정 단백질을 겨냥하는 저격무기다. 2001년 글리벡 이후 흑색종 혈액암 폐암 유방암에서는 이런 저격용 무기가 하나 둘 늘어났다. 3세대 항암제인 면역항암제는 종양내과 의사들이 갖고 있는 최첨단무기. T세포와 같은 면역세포가 암세포와 잘 싸울 수 있도록 돕는다. 2011년에 흑색종 치료제로 여보이가 승인을 받은 바 있다. 이후 많은 암의 치료를 바꿔놓았다.
이번 췌장암 신약은 표적치료제다. 표적으로 삼은 췌장암 유전자 돌연변이는 KRAS. KRAS는 세포의 성장 스위치다. 세포 외부에서 관련 신호가 올 때만 KRAS는 반응해야 한다. 켜졌다가 다시 꺼져야 세포가 정상이다, 그런데 암세포에서 KRAS는 고장 난 스위치다. 꺼져야 할 순간에도 켜져 있다. 그리고 세포에게 계속 속삭인다. 성장하라, 분열하라, 죽지말라. 세포에게 계속 달리라고 주문하는 거다. 세포의 멈추지 않는 폭주, 그게 암세포다. 달리 말하면 암은 외부 침입자가 아니다. 생명을 살리는 장치가 괴물로 변한 거다.
문제는 KRAS를 공략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과학자들이 KRAS 암 유전자를 발견한 게 1982년. 그러나 잡으려 해도 잡을 데가 없어 보이는 단백질이었다. KRAS 표면은 매끄러웠다. 약이 달라붙을 깊은 홈이 없었다. 수십 년간 수없이 많은 시도가 실패하면서 과학계에는 조용한 체념이 자리잡았다. KRAS는 공략이 불가능하다!
KRAS를 공략할 첫번째 방법을 찾아낸 건 화학자 케번 쇼캣(UC샌프란시스코 교수). 그의 팀은 KRAS의 한 돌연변이(G12C)를 들여다보고 잘 보이지 않던 틈을 찾아냈다. 그 틈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단백질 스위치가 꺼지는 순간에만 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공간이었다. 아무도 그 순간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틈에 달라붙는 작은 분자를 이들은 만들었다. 이 발견이 최초의 KRAS 표적치료제 개발로 이어졌다. 소토라십. 이 약은 폐암 치료제로 2021년 승인받았다.
소토라십이 잡는 돌연변이는 췌장암에 흔치 않다는 한계가 있었다. 췌장암에는 다른 돌연변이들이 더 많다. G12D, G12V, G12R과 같은 변이들이 주류다. 소토라십으로는 속수무책. ASCO 2026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다락손라십은 바로 이들 돌연변이들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인 거다. 난공불락이던 췌장암에 균열을 내는 데 성공했다.
현대 신약은 집요한 팀플레이의 성과물
이걸 해낸 과학자들은 미국 바이오 기업 레볼루션 메디슨의 연구자들이다. 이 물질 개발 과정에서는 한명으로 압축할 수 있는 영웅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현대 신약 개발 과정의 특징이다. 약물화학 구조생물학 암생물학 임상개발이 협력하는 산업계의 집단 발명에 가깝다. 현대 신약은 점점 이런 과정을 통해 태어난다. 한 사람의 번뜩임이 아니라 문제를 붙잡은 팀이 집요하게 달라붙어 성과를 만들어낸다.
췌장암 치료가 다락손라십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완치시대가 열린 것도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시카고 행사장에서의 기립박수는 췌장암 신약 하나에 보내는 게 아니었다. 췌장암에 대한 오래된 체념이 처음으로 낯설 게 보이는 순간을 축하하는 박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