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AI·재생e에 흔들리는 전력망
미, 전력수요 급증에 비상사태 선포 … EU는 ESS·송전망 투자 확대 나서
미국과 유럽이 올여름 전력망 안정성 확보라는 공통 과제에 직면했다.
표면적으로 미국은 폭염에 따른 전력수요 급증, 유럽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계통 불안정이라는 서로 다른 문제에 직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사례 모두 전력망 운영과 계통 안정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현상으로 분석된다.
◆미, 실시간 전력가격 10배 급등 = 미국 에너지부는 12일(현지시간)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남동부 지역에 전력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FIFA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캘리포니아 베이지역, 뉴저지, 매사추세츠 등 동서 해안에서 폭염주의보도 발령했다. 기록적인 폭염이 예고되면서 냉방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 에너지부는 발전소의 최대 출력 운전을 허용하고 일부 환경규제를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조치까지 시행했다.
PJM 전력시장에서는 실시간 전력가격이 MWh당 1300달러를 넘어서는 등 공급 부족 우려가 확산됐다. PJM 시장의 올초 전력 평균가격이 130~140달러 수준에서 형성됐던 점을 고려하면 약 10배 급등한 것이다.
이는 전력 공급 부족 우려가 시장가격에 즉각 반영된 결과로 미국 전력망의 계통 안정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PJM 전력시장은 13개 주와 워싱턴 D.C.에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전력 거래와 전력망 운영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문제는 단순히 여름철 전력수요 증가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인공지능(AI) 산업 성장에 따라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24시간 대규모 전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기존 전력수급 체계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다.
미국 기후예측센터는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 증가와 AI 산업 확대가 동시에 전력망 부담을 키우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FIFA 월드컵 개최를 앞둔 일부 지역에서는 전력 사용량 증가가 예상돼 전력망 운영기관들이 비상 수요관리 프로그램까지 검토하고 있다.
◆전력생산보다 안정적 공급이 중요 = 유럽이 직면한 문제는 미국과 다소 다르다. 유럽은 태양광과 풍력 중심의 에너지 전환을 빠르게 추진해 왔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날씨에 따른 발전량 변동성이 커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지난해 대규모 정전 사태 이후 전압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스발전소 가동을 크게 늘렸다. 현재 가스발전 최소 출력 수준은 정전 이전보다 약 40% 증가한 상태다.
이에 대해 유럽연합(EU)은 가스발전 확대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면서도 전력망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송전망 확충과 국가간 전력연계 강화, ESS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EU는 스페인에 가스정책 축소를 요구했다.
이에 스페인은 현재 8.15GW 규모인 에너지저장설비를 2030년 22.5GW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EU도 90억유로 규모의 예비전력 확보 제도를 승인하며 전력망 안정화에 나서고 있다.
미국과 유럽 사례의 공통점은 발전설비 부족이 아니라 계통 유연성 부족이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발전소를 많이 건설하면 전력수급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됐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폭염으로 전력수요가 급증하는 시간대에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감소할 수 있고, 풍력이 약해지거나 태양광 출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가능해야 한다.
때문에 ESS와 스마트그리드, 수요관리(DR), 송전망 확충 등 계통 안정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전기 생산 능력보다 생산된 전기를 필요한 곳에 제때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예외 아냐 “전력망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 = 미국과 유럽 사례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역시 여름철 폭염과 AI 데이터센터 확대, 반도체 공장 증설, 전기차 보급 증가 등으로 전력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동시에 탄소중립 정책에 따라 태양광과 해상풍력 확대도 적극 추진되고 있다.
이 가운데 재생에너지 확대 과정에서 나타나는 출력제어 문제가 주요 해결과제로 떠올랐다. 제주지역에서는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수요를 초과하면서 발전을 강제로 줄이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송전망 부족으로 발전설비를 충분히 활용 못하는 상황도 나타난다.
에너지업계 한 관계자는 “에너지정책의 중심이 발전원 확대 논쟁을 넘어 전력망 경쟁력 강화로 이동해야 한다”며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최근 재생에너지 설비를 100GW까지 확충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생산된 전기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공급하겠다는 내용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AI와 전기화 시대가 본격화될수록 전력망 자체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로 부상할 것”이라며 “송전망 확충과 ESS 구축, 계통 운영 기술 고도화, 수요관리 체계 구축 등이 국가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