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만든 캐나다 총선의 대반전

2025-05-02 13:00:03 게재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놀라운 복귀 중 하나" … 자유당 지지율 25%차 극복'정권연장'

"미국과의 오랜 동맹관계는 끝났다. 수십년 동안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 준 개방적인 세계무역체제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비극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현실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캐나다 마크 카니 총리 AFP=연합뉴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실시된 캐나다 연방하원 총선에서 자유당을 승리로 이끈 마크 카니 총리의 연설이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전체 343석 가운데 169석을 얻어 144석에 그친 보수당을 따돌렸다. 4차례 연속 총선 승리를 기록했다. 과반인 172석에는 3석 모자랐지만 캐나다 의원내각제 정치체제에서 자유당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미국과의 영원한 동맹은 끝났다”

올해 초만 해도 야당인 보수당은 45% 가까운 지지를 얻으며 저스틴 트뤼도 전 총리가 이끌던 자유당에 20% 이상 앞서 있었다. 자유당정부가 연 30만명 수준이던 이민자를 50만명까지 받아들이면서 부동산 가격은 터무니없이 치솟았고, 주택공급은 부진했다. 임금은 정체돼 있는데 물가는 최고 연 8% 가까이 올라 캐나다인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2015년 정권을 넘겨줬던 보수당은 트뤼도 총리의 인기가 바닥을 치면서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을 기회를 맞았다. 피에르 포이리에브 보수당 대표는 트뤼도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 제출을 비롯해 조기총선 실시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결국 트뤼도 총리는 지난 1월 6일 사임 의사를 밝혔고, 자유당은 경선을 통해 10일 뒤 마크 카니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이 시점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임기를 시작했다. 트럼프는 취임 2주 만에 캐나다에 ‘관세전쟁’을 선포했다. 캐나다 내부에서 미국에 대한 반발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워싱턴포스트’는 캐나다 총선이 끝난 뒤 “자유당의 극적인 반전은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정치적 복귀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반전을 가능하게 한 주인공은 단연 트럼프 대통령이었다는 분석이다. ‘트럼프 이슈’가 부동산과 이민, 물가 등 캐나다 총선의 모든 의제를 단번에 집어삼킨 것이다. 캐나다 공영방송 CBC에 출연한 정치전문가는 미국 대통령의 연봉이 40만달러라는 점을 언급하며, “총선에서 이긴 자유당은 기꺼이 그 금액을 선거비용으로 지급할 용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엘보즈 업(Elbows up)’은 ‘필요할 때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아이스하키 용어다. 캐나다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인 아이스하키에서 경기가 과열되면 선수들은 스틱을 빙판에 내던지고 주먹다짐도 피하지 않는다. 하버드대 재학 시절 아이스하키 팀에서 골키퍼를 했던 카니의 선거캠프는 ‘엘보즈 업’을 캠페인 구호로 사용했다. 선거 광고에서 카니는 한 코미디언과 하키 링크에 등장했다. 어쩌면 유치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이 광고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만들겠다”고 잇따라 도발하는 가운데 캐나다인들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외부의 도발에 피하지 말고 맞서 싸우자는 의미였다.

“엘보즈 업!” 외친 마크 카니

‘영원한 동맹’으로 인식되던 미국 대통령의 관세정책은 캐나다인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카니는 ‘강한 캐나다(Canada strong)’를 주창하며 이에 대응했다. 경제전쟁을 벌여야 한다면 결코 피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캐나다인의 전의를 한곳으로 모으는 역할을 한 것이다.

반면 정권 탈환이 유력시되던 보수당의 실패는 이런 흐름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포이리에브 보수당 대표는 지난해부터 트뤼도 전 총리를 공격하는 데 화력을 집중했다. 그가 내세운 구호는 ‘변화’였다. 자유당 10년 정권을 끝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는 트뤼도가 물러나면서 방향을 잃었다. 더구나 트럼프가 캐나다를 향해 관세 전쟁을 선포했을 때나 합병을 얘기했을 때도 그는 처음부터 강한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트럼프의 핵심 참모역할을 하고 있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회장이 포이리에브를 지지한 것도 마이너스가 됐다. 머스크 회장은 올해 초 트뤼도를 비판하면서 보수당 대표에게 정치적 유대감을 드러냈다. 특히 트럼프의 발언은 캐나다 총선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는 총선을 코앞에 두고도 “당신들의 세금을 반으로 줄이고, 군사력을 세계 최고 수준까지 무료로 강화하며, 자동차 철강 에너지 등 모든 산업을 4배 성장시키겠다. 단 캐나다가 미국의 소중한 51번째 주가 될 경우”라고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MAGA 냄새부터 지우라”

브리티시콜롬비아대(UBC) 정치학과 리처드 존스턴 교수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캐나다 총선이 서방 국가와 정치권에 주는 교훈은 ‘MAGA(트럼프식 보수주의)’ 냄새를 지우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 우선주의로 돌아선 트럼프 앞에서 동맹관계를 맹신하지 말라는 경고다.

로이터통신은 캐나다의 사례가 서방 여러 국가에서 유사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예를 들어 호주는 5월 3일 선거를 치르는데 주요 정당은 캐나다 자유당의 지지율 상승 요인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 로이터는 호주에서도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트럼프의 관세정책으로 인한 우려가 번지면서 유권자들이 중도좌파인 노동당 지지로 기울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 역시 트럼프에 온건한 입장을 취한 노동당정부의 인기가 갈수록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몰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로이터통신은 “마크 카니 총리가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에 맞서 글로벌 리더 역할을 모색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카니 총리는 “자유무역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합을 구축하는 데 리더 역할을 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미국이 더 이상 리더 역할을 원하지 않는다면 캐나다가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캐나다 언론들은 트럼프의 등장에 따른 이번 총선의 결과가 세계 각국의 정치 구도를 재편성하는 기점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총선 선거운동 기간 캐나다에서는 지역갈등이 서서히 불거지기 시작했다. 일간지 ‘글로브앤메일’ 조사에 따르면 캐나다인 5명 가운데 3명은 ‘서부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답했다.

원유와 천연가스를 비롯한 에너지 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앨버타주와 대평원 지역인 사스캐처원, 매니토바주 등에서 분리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특히 이들 지역은 보수당이 강세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니얼 스미스 앨버타 주총리는 연방선거 결과가 나온 뒤 “많은 유권자들은 자유당이 다시 연방정치권을 장악한 데 불만을 갖고 있다”면서 “연방정부 차원에서 앨버타의 이익을 해치려 든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각을 세웠다.

앨버타주에서는 미국으로의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이 지역경제의 핵심이다. 하지만 연방정부는 기후변화 대응 등을 이유로 오일샌드 개발 규제에 나서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갈등을 빚어 왔다.

트럼프와의 관세협상 등 현안 산적

카니는 선거 유세 중 작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저는 예산을 관리한 경험이 있고 경제를 운용해 봤으며 위기를 다뤄봤다. 지금은 실험이 아니라 경험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대반전을 이뤄내며 총선 승리를 거머쥔 마크 카니 앞에는 현안이 산적해 있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세 협상이 가장 큰 산이다. 총선 직후 양국 정상은 전화통화를 갖고 만남을 약속했다. 트럼프는 “‘나이스 젠틀맨’ 카니 총리가 5월초 백악관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과 인플레, 경기침체 우려 등도 자유당 정권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마크 카니의 정치 경력은 고작해야 몇달 정도다. 하지만 2008년 캐나다중앙은행장을 맡아 금융위기를 무사히 넘기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영국중앙은행은 2013년 그를 첫 비영국인 총재로 임명했다. G7 국가의 중앙은행 두곳을 이끈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그는 영국의 브렉시트 혼란 가운데 유동성 공급으로 시장을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크 카니는 자유당 대표가 된 뒤 트뤼도 전 총리가 추진했던 탄소세와 양도소득세 개편안을 철회하는 등 결단력을 보였다.

김용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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