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비영리·상호부조 기반 제2공적보험 필요
한국의 실손의료보험은 애초 국민건강보험이 미처 보장하지 못하는 본인부담과 비급여를 보완하겠다는 선의의 취지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도입 이후 20여 년 사이 실손 가입률은 급격히 상승했다. 이 과정에서 실손보험이 공적 의료보장을 강화하기보다는 도덕적 해이와 과잉의료, 재정 누수라는 구조적 문제를 통해 오히려 공적 체계를 약화시키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실손보험 이용, 과잉의료 양산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실손보험 가입자는 비가입자에 비해 입원일수와 외래 방문 빈도, 외래 방문당 본인부담금이 모두 유의하게 높다. 환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실손에서 나올 돈”이라는 인식이, 공급자 입장에서는 “같은 환자라도 더 많은 진료를 할수록 수입이 늘어나는” 구조가 결합해, 이른바 ‘의료쇼핑’과 과잉진료를 부추긴다.
감사원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러한 실손 연계 과잉이용으로 인해 건강보험 재정에서만 연간 최대 11조 원 규모의 추가 지출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본래라면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와 필수의료 강화에 투입될 수 있었던 재원이 새어나간 셈이다.
실손보험의 또 다른 문제는 의료보장의 형평성과 공공성을 잠식한다는 데 있다. 공적 건강보험은 소득비례 보험료와 동일한 급여 체계를 통해 “누구나, 어디서나, 필요한 의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실손보험은 가입·유지 능력과 위험도에 따라 사실상의 계층별 2층 구조를 만든다. 고소득·저위험층은 촘촘한 실손 보장으로 의료비 위험에서 비교적 잘 보호되는 반면, 고위험·저소득층은 가입 자체가 어렵거나 보장이 취약해 공적 체계 안에서도 사적 차이가 덧씌워진다. 게다가 실손보험료로 지불되는 막대한 기금 중 상당 부분은 보험사의 사업비와 이윤으로 흘러가 공공의료 재정으로 축적되지 못하고, 이는 한국의 낮은 공적 재원 비중·높은 본인부담 구조를 고착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실손보험을 어떻게 더 잘 팔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구조가 국민 전체의 의료보장을 더 두텁고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를 묻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답은 공적 건강보험 보장성을 단계적으로 OECD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서, 민간 실손이 담당해 온 영역을 점차 비영리·상호부조 기반의 제2 공적 보험으로 대체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상호부조·공제조합이 공적 건강보험의 보충축으로 자리잡아, 본인부담 경감과 장기요양·재활·만성질환 관리 등을 담당하는 구조는 이미 낯선 모델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지역 의료생협, 사회적경제 조직, 직능단체 등이 참여하는 공제방식 제2 공적 보험을 제도화하여, 현재 실손보험이 채우고 있는 영역을 '이윤'이 아닌 '연대와 필요'의 원리로 재구성할 수 있다.
연대와 필요에 따른 의료보장 중요
실손보험 중심의 2층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일부 규제만 강화하는 것으로는 근본적 전환을 이루기 어렵다. 건강보험과 실손보험 간 정보 연계와 부정청구 통제, 과도한 전액보장 상품 제한 등 단기적 정비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건강보험(1층) + 공제방식 제2 공적 보험(2층)”이라는 새로운 설계에 정치적·사회적 결단을 모으는 일이다. 병·의원 문턱을 낮추는 힘, 병이 나도 가계가 무너지지 않는 힘, 지역과 계층을 가로지르는 연대의 힘이 이중의 공적보험 구조 안에서 작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실손보험의 그늘을 넘어선 한국형 의료보장 체계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임종한 한국의료복지사협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