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대기업 직원들만의 천국’ 될 건가
‘일본보다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설마’ 싶었던 일이 현실이 됐다. 적어도 통계수치로는 그렇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이 2023년(3만6194달러)에 이어 작년(3만6624달러)에도 2년 연속 일본(2023년 3만5793달러, 2024년 3만2859달러)을 앞섰다. 하지만 숫자가 모든 걸 말해주지는 않는다. 내용을 짚어보면 마냥 즐거워 할 일인지, 조금 더 생각하게 된다.
우선 국민소득에서 ‘대역전극’이 펼쳐진 것은 우리가 잘해서라기보다는 일본이 ‘30년 소비 불황’을 헤매고 있는 탓이 더 크다. 일본은 내수 불황을 타개할 돌파구로 수출 증대를 위한 ‘엔저(엔화가치 약세)’ 전략을 편 탓에 달러로 환산한 GNI가 뒷걸음치기까지 했다.
한·일'국민소득 대역전극' 원인은 일본이 30년 불황으로 헤맨 탓
일본에 비해 한국 사정도 그다지 나을 게 없다. 2014년 처음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선 이후 11년째 제자리걸음을 맴돌고 있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등 일부 업종에 치우친 주력 산업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설상가상으로 이들 주력산업마저 후발주자였던 중국에 대거 추격당하고 있다. 전기자동차와 배터리 등 미래 유망분야에서는 오히려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격차로 우리가 뒤처져 있다. 다른 신산업을 키우지 못한 한국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빨간 불이 켜진지 한참 됐다.
일본은 이 점에서 한국과 다르다. 중화학산업 주도권을 내준 이후에도 여전히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버티고 있다. 소재·부품·장비 등 핵심 기초산업 분야에서 강고한 철옹성을 쌓아올리고 있어서다. 한국 주력산업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도 일본이 ‘소·부·장’을 공급하며 뒤를 받쳐주는 덕분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한·일 관계가 정치적으로 악화됐을 때 일본 정부가 이들 ‘소·부·장’의 파이프를 잠그자 한국에서 일대 난리가 빚어졌던 배경이다.
비록 일본이 내수불황을 겪고 있지만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저력을 의심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기초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개발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서다. 노벨 물리·화학 등 과학상 분야에서 한국은 단 한 명의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했는데 일본은 25명이나 수상했다. 기초분야 연구개발 경쟁력이 전무(全無)한 채 몇몇 조립·재가공형 중화학산업에서 세계 1위에 올라 일시적인 호황을 구가해 온 한국과는 차원이 다르다.
실상이 이렇지만 한국이 일본을 확실하게 앞선 분야가 국민소득 통계 말고 또 한 가지 있다. 대기업 임직원들의 급여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대기업의 평균 연봉(2022년 구매력평가환율 기준, 8만7130달러)이 일본(5만6987달러)보다 1.5배나 많았다. 일본을 앞지른 반도체·조선·철강과 자동차·화학 등에서만 많은 것도 아니다. 금융과 정보통신(IT) 등 내수산업에서도 일본 대기업들을 압도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 20년간 임금상승률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한국 대기업들의 임금이 158% 뛰어오른 반면 일본은 되레 6.8% 줄어들었다. 한국 대기업들의 노동생산성이 크게 올라서가 아니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 인상되는 연공형 임금체계에다 대기업 노조들의 임금인상 투쟁이 받아들여져 온 결과다.
임금 양극화 심화에 청년들 중소기업 기피로 구인난 극심
대기업들의 과도한 임금상승 탓에 대·중소기업간 임금격차는 급속히 벌어지고 있다. 2002년 대기업의 70%였던 중소기업들의 평균임금 수준이 2022년엔 58%로 내려앉았다. 임금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기피하고, 중소기업들의 구인난이 극심해지는 이중고가 지속되고 있다.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될, 너무도 기형적인 상황이다. 어쩌다가 대한민국이 ‘대기업 직원들만의 천국’이 된 건지, 면밀한 진단과 제대로 된 대책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