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
지구 종말시계는 ‘자정 85초 전’
코스피 5500. 여의도 증권가에 환호성이 터진다. 숫자는 언제나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래프가 위로 향하면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들뜬다. 경제가 회복되고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번진다. 공항철도에는 대형 캐리어를 끌고 가는 해외여행객들이 넘쳐나고 면세점 매출은 최고치를 경신한다. 카드 사용액은 늘고 명품 매장은 붐빈다.
겉으로 보면 우리는 이미 위기를 건넌 듯하다. 숫자는 희망을 약속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뉴스 화면을 장식하는 것 또한 대기업 총수들의 환한 표정과 거액의 성과급 소식이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산업의 호황이 실적을 밀어 올렸다는 분석이 이어진다.
하지만 청년 일자리가 얼마나 늘어날지에 대한 전망은 뚜렷하지 않다. 생활물가는 오르고 변두리 상가는 한산하다. 자영업자의 폐업은 일상이 되었고, 집값을 잡겠다며 쏟아지는 정책은 또 다른 부담을 남긴다. 집 없는 청년들의 주거 불안은 여전하다. 정치권은 음모론과 권력투쟁에 빠져 있고 국회는 소모적 충돌을 반복한다. 상승하는 지수와 달리 삶의 체감 온도는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는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복합위기가 소나기를 품은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풍경을 보게 된다. 1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우크라이나전쟁은 만 4년을 넘기고 유럽안보가 흔들리며 국제질서가 요동친다. 강대국 간 전략 경쟁은 심화되고, 동맹은 이해관계에 따라 재편된다. 기후위기는 폭염과 한파, 산불과 홍수로 일상을 위협하고 식량위기를 부른다. 남북극의 빙하는 빠르게 녹으면서 기상은 난폭해지고 있다. 기후난민이 폭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곳곳에서 민족주의를 표방한 독재권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판단과 노동을 빠르게 대체하며 산업 지형을 바꿔놓는다. 그럼에도 시장은 낙관한다. 이 낙관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우리는 위기를 통과한 것일까, 아니면 정교하게 포장된 환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인류 문명 파멸 가능성 어느때보다 높아
코스피가 5000선을 돌파해 흥분이 가득하던 1월 27일, 미국 시카고의 미국 핵과학자회는 인류 문명의 파멸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고 경고했다. 핵과학자 협회가 1947년부터 운영해온 ‘종말시계’의 시곗바늘을 ‘자정 85초 전’으로 옮긴 것이다. 자정은 회복불능의 상태, 인간이 통제를 상실한 지점을 뜻한다.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로버트 오펜하이머도 이 협회의 창립멤버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목격한 과학자들이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만든 상징이 바로 이 시계다.
냉전이 격화됐던 시절 ‘자정 7분 전’을 가리키던 바늘은 한때 멀어졌으나, 지금은 다시 빠르게 자정을 향해 급속히 다가서고 있다. 최초 종말시계는 냉전시대 핵무기경쟁의 무서움을 일깨우기 위해 만든 것이다.
현재 세계에는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 등 9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핵탄두 수는 냉전 시절보다 줄었지만 핵군축 체제는 흔들리고 핵 억지의 균형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특히 북한핵은 한국과 일본을 자극하며 동북아 안보불안을 유발하고 있다. 핵은 단지 보유의 문제만 아니라 오판과 사고의 문제를 품고 있다. 기술적 오류, 오인된 경보, 지도자의 판단 착오는 세계를 순식간에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이끌 수 있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위기로 부상하고 있다. 기록적인 폭염은 농업생산을 위협하고, 대형 산불은 도시를 삼킨다.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나타나며 식량과 물 위기를 야기한다. 기후가 안보를 뒤흔들 판이다. 탄소 감축을 약속한 국제 합의는 각국의 이해관계 속에 헝클어지고 있다.
인공지능은 또 다른 차원의 도전을 던진다. AI는 의료진단과 신약 개발, 금융 분석과 군사 전략까지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효율은 높아지지만 책임의 주체는 불분명해진다. 자율무기체계와 알고리즘 의사결정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일자리 구조는 급격히 재편되고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될 수 있다. 돈을 가진 대기업들은 AI개발에 혼신의 힘을 쏟고 정부는 신나게 지원하는 정책을 쏟아내지만 AI가 초래할 불평등과 부작용에 대한 대응엔 고민이 없어보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 아닌 윤리와 절제
문제는 이 세 가지가 분리된 위험이 아니라는 점이다. 핵무기의 긴장, 기후의 붕괴, 인공지능의 가속은 서로 얽히며 증폭되는 복합위기를 형성한다. 기후재난은 정치적 불안을 키우고, 불안정한 정치환경은 군사적 충돌을 부른다. AI는 군비경쟁을 가속화하고 정보전을 증폭시킨다. 각각의 위기는 서로를 자극하며 상승위험을 만들어낸다.
지금 인류에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윤리, 경쟁이 아니라 절제다. 기술과 권력이 커질수록 책임 또한 커져야 한다. 국제적 협력과 집단적 도덕성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종말시계의 바늘은 더 빨라질 것이다.
여의도에는 다시 환호가 울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종말 시계는 소리없이 움직인다. 상승하는 지수는 희망의 신호일까, 아니면 우리가 듣지 않으려는 경고를 덮는 소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