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금융시장 혁신으로 생산성 높여야
한국은 만성적인 고저축 국가다. 한때 41.8%에 달했던 총저축률이 외환위기 이후 2002년 32%까지 떨어지긴 했으나 이후 노후 연금저축 증가로 다시 30% 중반대로 상승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급격한 변동을 보인 것은 국내 총투자율이다. 고도성장기에는 저축률을 크게 상회하던 것이 외환위기 이후 30%대로 급락한 후 2015년에는 저축률을 6.7%p나 하회했다. 그리고 그 차이가 지난 해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내 저축-투자의 변화는 한국 금융시장에 종전과 전혀 다른 현상을 만들어 냈다. 국내 수요를 상회하는 풍부한 유동자금으로 시장금리는 지속 하락해 국내 금리가 미국보다 낮아지는 현상이 굳어졌다. 그리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자금이 늘면서 원/달러 환율은 10년 전에 “높다”고 여겨지던 1200원을 훌쩍 넘어 이제는 1300원 중반 이상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시장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여야 한다.
투자의 ‘양’이 아니라 ‘질’을 높여야 한다
한국경제는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와 투자 부진이 맞물리며 장기간 저성장의 늪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 특히 성장의 핵심 동력인 투자가 과거와 달리 크게 둔화된 점이 두드러진다. 국내 총고정자본형성률(GDP 대비 고정투자율)은 최근 수년간 30%대에 머물러 있는데 이 수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할 만큼 매우 높은 수준으로 이 비율을 더 끌어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과거 산업화 시기에는 설비투자 확대를 통해 고속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나 이제는 투자 ‘양’의 확대만으로는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힘들다. 성장전략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투자 대비 성과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총요소생산성(TFP)은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다. 같은 자금을 투입해도 과거만큼 생산이나 부가가치가 늘지 않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인구 고령화로 노동투입의 증가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생산성 부진은 경제성장률 둔화로 직결된다. 성장률을 다시 높이려면 정체된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다.
한국 금융은 은행 중심의 간접금융 위주로 발달해 자본시장이 경제 규모에 비해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다. 국내 자본시장은 선진국에 비해 투명성이나 전문성에서 뒤처지고 혁신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역량이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벤처투자 규모를 보면 GDP 대비 미국의 절반, 벤처 강국 이스라엘의 20% 수준에 머물고 있다. 혁신 스타트업들은 충분한 투자 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반대로 생산성이 낮은 한계기업들은 저금리 지원 등에 기대어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은 채 연명해오는 상황이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은행부문이 부동산대출에 치중하면서 가계의 투자지출이 투기적이고 비효율적인 부동산 투자에 집중되어 왔다.
금융시장 개혁 없이 미래는 없다
한국경제가 현재 겪는 성장 정체와 경쟁력 약화의 이면에는 이러한 자본배분 시스템의 비효율이 자리잡고 있다. 이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과감한 금융혁신이 필요하다. 은행이 부동산금융 중심의 수익구조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자본시장이 생산적인 투자를 선별하고 감시하며 부실기업을 퇴출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업공개(IPO)나 벤처투자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 원칙을 확립하여 구조조정이 수시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관의 개입 없이 자본이 스스로 가장 효율적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한다. 넘치는 돈이 국내에서 혁신과 일자리로 흐르게 만드는 일, 그것이 한국경제의 다음 도약을 위한 선결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