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사법부 자정 기대할 수 있을까
대법원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유죄취지 파기환송 판결로 촉발돼 첨예한 논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던 26일 전국법관대표회의가 결론없이 끝났다. 정치적 시비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조심스런 태도가 한편 이해되면서도 들끓는 민심과는 동떨어진 ‘한가한 판사집단주의’가 드러난 것으로 보여 아쉬움이 크다. 조희대 대법원장의 난데없는 ‘대선개입’과 ‘사법불신 자초’ 이후 일부 판사들 요구로 법관회의가 소집될 당시의 결기에 비하면 ‘찻잔 속 태풍’에 그친 격 아닌가.
조희대 대법원장 착각과 오만, 지귀연 판사 특권의식의 뿌리
사법부가 도마에 오른 것은 조 대법원장이 정치 한복판에 뛰어들어 이례적인 초스피드로 상고심 판결을 진행한 데서 비롯됐다. 조 대법원장은 사건을 소부배당 2시간 만에 직권으로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두 차례 평의를 거친 뒤 무죄를 선고한 2심을 9일 만에 뒤집어 유죄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절차를 건너뛴 전례없는 초고속 판결 기세는 파기환송심이 대법원에 재상고되면 이재명 후보의 자격박탈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를 낳기에 충분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권 정신이 몇몇 대법관들의 독단적 결정으로 능멸당하는 것 아니냐는 반발로 민심이 들끓었다. 조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이 거론되는 등 거센 역풍에 유야무야 됐으나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뿌리째 흔들렸다.
조 대법원장은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황당한 무리수를 감행했을까. ‘나만이 옳다’는 독선과 편견에 취한 엘리트주의의 산물이었을까. ‘최고 사법기구인 우리가 결정하는데 누가 토를 달 것이며 토를 단들 어쩔 건대’ 하는 오만에 취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자신에게 부여된 당연한 권리로 착각한 것 아니었을까.
대법원의 초광속재판은 일개 판사의 소영웅주의 일탈 정도로 넘어갈 뻔한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윤석열 전 대통령 구속취소 결정을 재소환하며 담긴 의미를 되새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둘 사이에 이심전심 교감이 있었는지, ‘보이지 않는 손’이 둘을 연계시켜 주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웅변으로 드러낸 계기였음은 분명하다.
사법개혁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전문가들 사이에 나오기는 했으나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은 법조계 양대 축인 검찰집단의 선택적 수사와 독점적 기소란 후안무치한 근육질 자랑이 워낙 도드라져 상대적으로 사법부 치부는 가려진 측면이 있다.
사법부가 3권분립이란 보호막 아래 우리사회에서 존중하고 지켜줘야 할 조직으로 각인됐던 통념 탓도 크다. 역대 독재정권에서 사법부가 권력에 굴종하고 법률적 뒷받침 역할을 해왔음에도 어쩔 수 없어 수동적으로 부역한 것이려니 하는 막연한 호의에 바탕한 허상이 자리 잡아왔다.
대법원의 관례를 무시한 초광속재판은 돌직구를 머리에 맞은 듯 국민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게 사실이다. 사법부가 내란의 적극적 옹호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 것이다. 실제 지 판사가 진행하는 김용현·노상원 내란재판은 군사기밀 보호를 내세워 비공개로 진행돼 왔다.
윤 전 대통령 내란 재판를 도맡고 있는 지귀연 판사에 대한 ‘비위제보’가 잇따르며 유흥주점 접대 등이 새삼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재판독립’이란 명분 아래 자행되는 부정의·부조리한 재판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분노와 각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전 대통령 내란 계기로 재조명되는 ‘제왕적 대법원장’의 민낯
윤 전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분탕질은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이를 떠받치던 기득권세력이 스멀스멀 정체를 드러내게 하는 전기가 됐다. 내란행위에 대한 단죄가 지지부진하면서 ‘어쩌면 뒤집기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동조세력·잔존세력의 착각과 마지막 몸부림이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우리사회 저변에 똬리 틀고 잠복해 있던 기득권 카르텔의 민낯을 드러내게 한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수호하겠다는 정신이 결여된 사법부독립 주장은 법치주의를 방패삼는 ‘사법독재’에 지나지 않는다.
진작 드러났던 정치권 검찰 언론 재벌 외에 공직자로서의 사명감보다는 사익추구에 더 열심인 고위관료들의 이기적 행태, 친위쿠데타에 동원된 것이라곤 하지만 언감생심 또다시 쿠데타세력의 손발로 종사한 육사 중심의 획일적인 군 조직도 함께 드러난 근본적 개혁의 대상임은 마찬가지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