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
전쟁이 일상이 된 시대, 나이 교수의 경고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하마스 인질사건 이후 가자지구를 초토화했고, 시리아 내 헤즈볼라 거점을 타격하는 등 강경 행보를 이어왔다. 결국 그의 목표는 이란 핵시설이었다.
그러나 세계를 더욱 긴장시킨 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B-2전략폭격기를 띄워 이란 핵시설 3곳에 벙커버스터를 투하한 일이다. 올해 1월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과의 직접 담판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조기 종식시키겠다며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면박주었고, 나토에 대한 회의적 발언으로 동맹국들을 당황시켰다. 그런 그가 중동에서 군사행동의 방아쇠를 먼저 당긴 셈이다.
1979년 이란 미 대사관 인질사태 이후, 미-이란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으나 이번처럼 직접 충돌의 문턱에 선 적은 드물다. 물론 이란의 제한적 반격에 이어 트럼프가 ‘이스라엘-이란 휴전’을 선언하며 상황은 일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3년째 지속되고 있다. 평화협상의 실마리는커녕 전선은 확대되고 무기의 살상력은 고도화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도 전운이 짙다. 대만해협에서는 중국의 군사훈련이 반복되고, 북한은 미사일 도발을 멈추지 않으며 핵무기 고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들에게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비로 배정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세계는 군비경쟁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전세계 군비경쟁 시대로 진입
경제도 예외는 아니다. 트럼프 1기 시절 시작된 미국의 관세전쟁은 글로벌 무역질서를 흔들어 놓았다. 현재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 희토류 인공지능 기술을 둘러싼 공급망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한국은 물론 유럽연합(EU) 일본 인도까지 이 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와 자유주의 국제경제질서는 붕괴되고, 그 자리를 각국의 경제적 하드파워 경쟁이 대신하고 있다.
이처럼 ‘하드파워의 귀환’은 정치 군사 경제 전반에서 뚜렷하다. 이 모든 책임을 트럼프에게 돌릴 수는 없지만 지난 5월 타계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의 마지막 경고가 더욱 무겁게 들린다. 그는 생의 마지막 몇주 간 CNN 등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소프트파워를 이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것을 해친다”고 지적했다. 외교력, 민주주의, 인권, 해외원조, ‘미국의소리’ 방송 등 미국의 핵심 소프트파워 자산들이 트럼프행정부 하에서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나이 교수는 “중국은 이 공백을 인식하고 이를 메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조지프 나이는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동구권 민주화가 진행되던 탈냉전기의 흐름 속에서 ‘소프트파워’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미국은 전후 세계를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가 아니라 민주주의 문화 인권 개방성 같은 ‘가치의 매력’을 통해 이끌어왔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지였다. 클린턴정부 시절에는 국가안보 부처에서 직접 이 개념을 정책화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나이의 소프트파워는 ‘강제하지 않고도 따르게 하는 힘’이다. 이후 그는 이 개념을 ‘스마트파워’로 확장했다. 즉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적절히 조합해 전략적으로 운용할 때 지속가능한 국제 리더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세계는 다시 하드파워 중심으로 회귀하고 있다. 러시아의 침략 전쟁, 중국 시진핑 주석의 영구집권과 대만 위협, 이란과 북한의 핵무장은 이 흐름을 명확히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은 이 전환에 불을 붙였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는 동맹을 ‘비용’으로 환산하게 만들었고 미국의 도덕적 매력을 협상의 ‘무기’로 바꾸었다. 나이 교수는 이러한 변화가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갉아먹고, 결국 미국의 리더십 자체를 약화시킬 것이라 경고했다.
지금 세계는 그 경고가 현실로 이어지는 국면에 들어섰다. 전쟁은 일상이 되었고, 협력은 거래로 바뀌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조차 외교의 방향을 잃고 전략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모습이다.
하드파워 바탕으로 소프트파워 결합해야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고 멀리 보아야 한다.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에 맞서기 위해 하드파워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 나갈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조지프 나이가 강조한 ‘스마트파워’가 필요하다. 하드파워를 바탕으로 하되 한국이 이룬 민주화와 경제성장, 그리고 K-컬처를 비롯한 소프트파워 자산을 전략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우리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를 일구었고 그 위에 민주화를 진전시켰으며 자유와 창의의 힘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계가 다시 힘의 논리로 기울고 있는 지금 한국은 ‘어떤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그 선택이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세계질서의 한장을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