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기술 상업화의 무대가 바뀌었다
2025년 노벨상 발표에서도 일본 연구자들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등 기초과학 분야에서 일본은 세계 최상위권의 연구력을 보여주었다. 사실 일본 경제의 성장사는 애초부터 연구실의 발명보다는 그것을 제품과 공정으로 완성해서 판매하는 산업화와 상업화 능력 위에 세워졌다.
전후 일본은 미국의 원천기술을 빠르게 흡수해 더 정밀하고, 더 싼 제품으로 세계시장을 장악했다. 자동차, 공작기계, 전자제품, 반도체 소재와 장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경쟁력은 언제나 말단기술과 현장혁신, 이른바 ‘현장력(現場力)’에 있었다. 품질관리와 공정개선이 곧 경쟁력이던 시대에 일본은 가장 강한 나라였다. 지금은 기초과학 분야에서도 강한 나라가 되었다.
기술을 어떻게 시장으로 연결시킬까가 정책 핵심
그런데 지금의 일본 경제는 답답하다. 세계 첨단산업이 소재와 제조 장치 분야에서 일본 기술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글로벌 공급망의 근간을 쥐고 있지만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최종 제품에서는 퇴조하고 있다. “일본은 기초과학은 강하지만 상업화에는 약하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현장력’이 쇠퇴했기 때문일까.
필자는 상업화가 이루어지는 무대 자체가 바뀐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본다. 20세기의 경쟁은 공장과 현장이 중심이었지만 21세기의 경쟁은 플랫폼 데이터 표준 규제 자본이 결합되며 산업과 기술, 생활의 경계가 흐려지는 이른바 ‘빅 블러(Big Blur) 현상’ 속의 생태계에서 벌어진다. 이제는 제품 하나를 잘 만드는 것만으로는 시장을 지배할 수 없다. 일본의 강점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강점이 작동하던 공간이 바뀐 것이다.
이 인식 위에서 2025년 일본정부는 방향 전환을 시도했다. 6월에 ‘통합혁신전략 2025’를 발표해 연구 성과를 실증과 사업화, 해외진출까지 연결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기술개발 자체보다 기술을 시장과 사회로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가 정책의 핵심 의제가 됐다.
의료기기와 딥테크 분야에서는 스타트업 대기업 병원 해외기업을 하나의 사슬로 묶어 상용화 비용과 규제를 동시에 낮추는 시도를 하고 있다. 양자기술 정책도 같은 흐름이다. 2025년을 ‘양자 산업화의 원년’으로 규정하며 연구 경쟁에서 시장 창출 단계로 목표를 이동시켰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라피더스(Rapidus) 국가 프로젝트와 설비투자 세제 논의를 통해 기술을 실제 투자와 생산으로 끌어들이려는 환경을 동시에 조성했다.
기업 차원에서도 연구와 산업 및 사회 생태계를 잇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2월 오픈AI와 함께 일본 기업용 AI의 공동전략 및 합작회사 설립에 합의했으며, 11월에 합작사 ‘SB OAI Japan’을 공식 출범시켜서 생성형 AI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겠다는 전략을 구체화했다.
도요타는 후지산 근처 옛 공장부지에 2021년 착공한 미래형 스마트 실험 도시 ‘우븐시티(Woven City)’를 올해 9월에 오픈했다. 기술을 제품이 아니라 생활 공간에서 실증하는 프로젝트다. . 자율주행 로봇 에너지관리 헬스케어 데이터연계 기술을 실제 거주 환경에서 검증하며 기술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받아들여지는지를 직접 확인한다. 완성차 제조사였던 도요타가 모빌리티와 생활 인프라 기업으로 변신하려는 전략이 이 실험 도시에 응축돼 있다.
우븐시티에서 진행되는 다이도(Dydo)사의 스마트 자판기 실증 역시 상징적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자판기지만 센서와 통신, 데이터 분석을 통해 결제와 에너지 관리, 정보제공까지 가능한 생활 서비스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를 검증한다.
세계시장에 맞는 상업화에 일본 경제 미래 달려
일본이 잃어버렸던 것은 상업화 능력이 아니라 변화한 무대에 맞는 상업화 방식이었다. 일본이 말단기술과 현장혁신이라는 오랜 저력 위에 기초기술 능력을 더해 이를 산업과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생태계의 시장에 옮겨 심을 수 있을지, 일본 경제의 다음 성패는 여기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