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모두가 패자가 되는 사회
경제학 수업에서 학생들은 ‘합리적 의사결정’에 대해 배운다.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 효과를 내려면 언제나 최적의 선택을 해야 한다. 후생경제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전경쟁시장에서는 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되어 최적 상태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이론에는 전제가 있다. 시장 실패가 없고, 모든 사람이 완전한 정보를 가지며, 개인이 늘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는 가정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보다 이론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문제는 우리가 이 논리를 현실에 그대로 적용해 왔다는 점이다. ‘경쟁하면 효율적이다’ ‘이긴 자는 당연히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능력주의와 결합하면서 사회규범이 되었다. 더 심각한 건 여기서 파생된 또 다른 논리다. ‘진 자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실패는 사회적 배제를 의미
한국 사회에서 실패는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인격적 낙인이 되었다. 대학입시에서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하면 ‘인생 실패자’, 취업에 실패하면 ‘사회부적응자’, 사업이 망하면 ‘무능력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실패의 원인이 개인의 노력 부족 때문이라는 사회적 시선이 이를 더욱 굳건히 만든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실패를 극도로 두려워하게 된다. 실패가 곧 사회적 배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이겨야만 하는 경쟁에 내몰린다. 하지만 경쟁에는 본질적 한계가 있다. 모든 사람이 이길 수는 없다. 1등은 항상 한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패자가 되는 구조다. 승자도 불안하다. 언제 자신이 패자로 전락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
행동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반드시 최적의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제시해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의 연구는 시사적이다. 사람들은 실제 경험할 때 느끼는 감정과 나중에 회상할 때의 평가가 다르다. 고통스러운 과정도 결과가 좋으면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과거 세대는 자신의 고된 경험을 그때는 다 그랬다며 미화하곤 한다.
하지만 지금 세대가 겪는 스트레스는 질적으로 다르다. 과거에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희망마저 불확실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고 한번 밀려나면 재기하기 어려운 구조다.
승자독식 구조에서 패자를 낙인찍는 방식은 이제 그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쟁 자체를 없애는 게 아니다. 경쟁은 사회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승자독식 구조에서 패자를 낙인찍는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먼저, 실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실패는 개인의 무능함이 아니라 도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실리콘밸리에서 ‘빨리 실패하고 빨리 배우라(Fail Fast, Learn Fast)’는 문화가 혁신을 이끄는 것처럼, 실패를 학습의 기회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둘째, 경쟁의 룰이 공정해야 한다. 출발선이 다른 경쟁에서 결과만으로 개인을 평가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통해 실패의 위험을 줄여야 한다.
셋째, 조금 덜 해도 괜찮다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소확행’이 주목받는 건 효율성보다 현재의 평온함을 중시하는 흐름이다. 이는 과도한 경쟁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발이자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모색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회 제도와 문화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겨야 하는 사회가 아니라, 져도 괜찮은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