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찬 칼럼
한국 ‘10만 양병설’과 중국 ‘천인계획’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공약했다. 이어 공약 제안자 중 한 명인 이공계 교수를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이에 앞서 서울대 공과대학은 매해 이공계 신입생의 1%에 해당하는 1000명을 선발 지원해 글로벌 기술 생태계를 주도하자는 한국판 ‘천인계획’을 새 정부에 제안했다.
의대 쏠림과 두뇌 해외 유출 등으로 이공계와 산업계가 직면한 ‘브레인 공동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서울대 공대가 제안한 대책에 ‘한국판’ 수식어가 붙은 것은 중국 정책을 본뜬 것이기 때문이다. 천인계획은 중국이 2008년부터 10년 내 해외에서 활약하는 혁신, 과학연구, 금융, 산업 분야 인재 1000명을 유치하겠다는 정책이다.
천인계획에 참여한 해외 인재는 1인당 100만위안(약 1억9000만원)의 보조금을 받는다. 최대 500만위안의 연구비가 제공된다. 50평대 아파트와 자녀교육비, 배우자 취업도 지원된다. 천인계획에 힘입어 중국은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우주항공 등의 전략산업이 급성장해 한국을 앞서거나 위협하고 있다.
오죽하면 서울 공대가 중국을 벤치마킹하자고 제안했을까마는 국내에서도 이미 비슷한 정책 제안이 있었다. 2012년 삼성경제연구소(현 삼성글로벌리서치)가 ‘과학기술 인재 10만 양병설’을 제기했다.
서울 공대가 왜 중국 모방 정책 내놨나
당시와 같은 인력공급이 이어지면 친환경에너지, 환경기술, 수송탐사, 첨단도시, 정보통신기술(ICT), 로봇, 신소재나노, 바이오의약, 고부가식품 등 9개 유망산업 분야에서 2013년 1400명, 2020년까지 연간 1만명씩 9만명의 과학기술 인재가 부족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매해 1만명의 석·박사급 인재를 확보하자며 기초 분야 장학금·연구비 확대 등의 ‘Super10000+Plan’(슈퍼맨 플랜) 전략도 제시했다.
언론이 주목해 보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도 심포지엄을 하며 거들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보고서와 전략을 내놓은 삼성마저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했고, HBM 연구개발팀을 해체한 끝에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밀렸다.
한국 정부가 삼성경제연구소의 10만 양병설을 가벼이 넘긴 그해 중국은 ‘천인계획’에 더해 ‘만인계획’을 발표했다. 만인계획은 10년 내 1만명의 인재 양성을 목표로 했다. 천인계획이 해외 인재 유치 전략이라면 만인계획은 국내 인재 육성책이었다. 조선시대 율곡 이이가 주창한 ‘10만 양병설’의 중국 현대판이었다.
이공계 인재양성 정책은 한국에서도 되풀이됐다. 윤석열정부도 빠지지 않았다. 2023년 2월 국가 차원의 종합적·체계적인 인재양성 정책을 수립·추진하겠다며 대통령이 의장인 민관협의체 ‘인재양성전략회의’가 구성됐다. 지난해 9월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서울대에서 열린 4차 인재양성전략회의에서 해외 인재 1000명 확보를 목표로 ‘K테크 패스 프로그램’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외국 인재에게 특별비자를 발급하고, 자녀교육과 주거 여건도 개선하기로 했다.
하지만 2024년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됐다. 그럼에도 지난해 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은 카이스트 졸업식 축사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라”고 말했다. 대통령 경호처는 “생색내지 말고 R&D예산 복원하십시오”라고 외치는 졸업생 입을 막고 끌어냈다.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발표 이후 이공계 상위권 학생들이 휴학·자퇴한 뒤 의대 입시를 준비하는 등 쏠림도 심화됐다.
국내 인재 양성이든, 해외 인재 유치든 구호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파격적 대우가 아니어도 꾸준한 연구개발 지원은 필수다. 단기간에 인재가 배출되지도 않는다. 정권에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한국이 2001년 8월 국제통화기금(IMF) 차입금을 갚고 IMF 관리체제를 조기 졸업한 배경에 김대중정부가 일으킨 정보기술(IT)산업 붐이 있었다. 닷컴 비즈니스를 초고속통신망이 떠받쳤는데 그 일을 한 곳은 직전 정부가 신설한 정보통신부였다. 김대중정부가 김영삼정부 정책을 이어받고, 정보고속도로를 놓아 신산업 불씨를 당겼다.
인재 양성 정책, 지속성과 방향성 중요
이재명정부는 ‘AI 3대 강국’을 내세웠다. 하지만 대한민국 현실은 관련 인력이 부족한 데다 ‘인재 유입국’이 아닌 ‘인재 유출국’이다. 대통령실에 40대 AI수석을 임명하고, 이공계 인재 지원 근거를 둔 특별법 시행령을 마련한 것만으론 부족하다. 파격적인 해외 인재 유치책과 함께 이공계 대학·연구·산업계를 아우르는 보상체계 개선이 절실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경제는 타이밍”이라고 강조했다. 인재 양성은 타이밍 못지않게 방향이 중요하다. 세계 50위권에도 끼지 못하는 서울대 수준 대학을 10개 만든다고 과학기술 인재가 육성될까. 그보다는 산학연 클러스터 조성과 더불어 특성화 연구대학 육성이 나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