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일 중심 사회에서 삶 중심 사회로

2025-07-29 13:00:06 게재

최근 ‘조용한 퇴직(Quiet Quitting)’과 ‘달팽이 여자(Snail Girl)’라는 새로운 일하는 방식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주목받고 있다. 조용한 퇴직은 직장을 조용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업무 외에는 과도한 헌신을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말한다. 2022년 미국의 한 20대 청년이 “일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인간의 가치는 노동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은 틱톡(TikTok )영상을 올린 것을 계기로 이 개념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업무에 충실하되 자신의 삶과 정신적 여유를 희생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등장한 개념이 ‘달팽이 여자’다. 이는 호주의 여성 창업가 시에나 라드비가 ‘달팽이 여자 에라(Snail Girl Era)’라는 칼럼에서 처음 제시한 말로, 빠르게 성공을 좇기보다는 자신만의 속도에 맞춰 일하며 행복과 자기 돌봄을 우선시하는 여성을 의미한다. 과거 ‘걸 보스(Girl Boss)’가 남성과 동등하게 일하고 성과를 내는 이미지였다면 달팽이 여자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며 ‘바쁘지 않아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변화하는 일에 대한 가치관

이러한 흐름은 일본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마이나비가 2025년 4월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20~59세 정규직 중 44.5%가 자신이 조용한 퇴직 상태라고 응답했으며, 특히 20대의 비율이 46.7%로 가장 높았다. 응답자 중 다수는 조용한 퇴직을 통해 ‘자신의 시간 확보’나 ‘급여에 걸맞은 업무량’ ‘직장 내 인간관계 개선’ 등 긍정적인 변화를 체감했다고 답했다. 기업의 반응은 엇갈린다. 중도 채용 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조용한 퇴직에 대해 ‘찬성’이 38.9%, ‘반대’가 32.1%로 나타났다. 특히 IT 금융 운송 업종에서는 찬성이 높았고, 부동산 유통업에서는 반대가 우세했다.

일본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으며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는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달팽이 여자와 같은 새로운 일하는 방식은 향후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장시간 노동을 전제로 하는 ‘탐욕스러운 일자리(greedy work)’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초과근무 야근 휴일 근무를 마다하지 않아야 좋은 평가를 받는 구조 속에서 일과 가정을 양립하려는 여성들의 고충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의 노동시장은 여전히 장시간 노동을 전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잔업 휴일출근 야간근무 등으로 소득을 늘리고 회사에 오래 머무는 것이 ‘우수한 사원’으로 평가받는 구조는 시대의 변화와 괴리돼 있다. 특히 이러한 시스템은 ‘달팽이 여자’로 상징되는 보다 느리지만 안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지향하는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입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장시간 근로 관행은 여성의 경력 단절은 물론 남성 본인의 삶의 질 저하와 육아·가사 참여 기회의 제한으로 이어진다.

이에 따라 이제는 남성의 근무 방식 역시 ‘탐욕스러운 일자리’에서 벗어나 가정과의 양립이 가능한 ‘유연한 일자리’로 재편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늘리기 위한 조치에 그치지 않고, 남성과 가족,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기반이기도 하다.

노동의 질과 삶의 만족도를 함께 고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기업은 인재를 유지하고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시간과 장소에 유연한 근무 형태, 성과 중심의 평가 시스템, 육아·가사와 병행 가능한 업무 구조 등 ‘유연한 일자리’의 확대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제 ‘많이 일하는 사람’보다 ‘지속가능하게 일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노동의 질과 삶의 만족도를 함께 고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모두에게 열려 있는 건강한 노동시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김명중 닛세이기초연구소 상석연구원 아지아대학교 특임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