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출연금과 투자금의 환상적 만남
과학기술 연구비는 공공의 이익을 목표로 반대급부 없이 정부가 출연하는 출연금과, 회수를 전제로 수익성을 기대하며 민간이 투자하는 투자금으로 구성된다. 출연금은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큰 수익을 가져올 것이라 믿고 장기투자하는 인내자본(Patient Capital) 성격을 갖는다.
기관명이 의미하듯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연구비는 90% 이상 출연금으로 구성된다. 출연금의 속성상 출연연은 국가의 과학기술비전 달성을 목표로 장기적인 연구를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최근 투입 대비 결과의 효율성이 강조되면서 기술료 수입 등 단기적인 수익성이 출연연 평가의 중요지표가 되고 있다. 여기서 출연연 연구의 정체성에 대한 딜레마가 초래된다.
물론 정부 출연금은 국민들의 소중한 세금에서 유래되기 때문에 소홀히 사용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연구비의 기본 속성과 결과에 대한 평가기준의 괴리로 인해 출연연의 역할이나 능력이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출연금으로 시작된 연구가 시장에서 꽃피우려면
이를 극복할 방법은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출연금만으로는 수익성 있는 연구 결과를 도출하기 어렵다. 정부 출연금으로 시작된 연구는 씨앗이 되고 민간 투자금을 만나야 시장에서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수한 연구도 사업화 과정에서 필요한 규모의 민간자금이 단계별로 투자되지 않으면 고사하게 된다. 씨앗의 품종을 잘 이해하고 필요할 때 자금이란 물을 대줄 수 있는 파트너, 즉 투자전문가가 필요하다.
따라서 출연연은 서울 여의도로 상징되는 금융계의 투자전문가들과 접촉의 폭을 넓혀야 한다. 투자 대비 회수를 전제로 하는 민간 투자금의 성격을 연구기획 단계부터 이해하고, 그들의 투자포인트를 연구 내용에 사전 반영해야 한다. 출연연과 국가과학기술연구회의 전문가 풀에 금융권에 종사하는 투자 전문가들을 적극 유치하고 활용하자. 정부 역시 R&D 예산 심의나 방향설정에 출연을 넘어 투자개념을 확장하고, 정부 출연금이 민간의 투자금과 원활하게 접목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하자.
다음 두가지 사례를 보자.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가 정보산업의 중심지라면 동부 보스턴은 최근 15년 바이오산업의 메카로 성장했다. 성공신화의 한축은 벤처캐피탈로 대표되는 투자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자금조달 이외에 연구 결과의 성공을 도와주는 전략적 투자자(Strategic Investment), 때론 컴퍼니빌더(Company Builder) 역할도 한다. 연구에 대한 이해도는 상상 이상이다. 자금력 또한 대단하다. 2022년 기준 보스턴에 투자된 정부 출연금 형태의 미국 국립보건원(NIH) 연구비는 32억달러, 벤처 캐피털 투자금은 136억달러다.
최근 소버린 AI 구축이 과학기술계의 가장 큰 화두다. 그럼에도 소버린 AI의 모태가 될 국가AI컴퓨팅센터 구축사업이 두번 연속 유찰되었다. 이 사업은 정부와 민간 합작으로 특수목적법인(SPC, 지분구조 51:49)을 세우고 약 2조5000억원 규모의 사업비를 조달해 1엑사플롭스(EF)급 이상 규모의 국가AI컴퓨팅센터를 지어 국내 AI 생태계 강화를 지원하는 것이 목표다.
유찰 사유는 간단하다. ‘지분이 큰 정부가 의사결정권을 행사하고 수익성과 운영리스크 등 책임은 민간이 진다’는 구조적 모순 때문이다. 아무리 사업의도가 좋더라도 수익을 추구하는 민간 입장에선 운영 자율성도 없는데 정부 지분의 바이백 의무까지 질 순 없다는, 사업성에 대한 부정적 판단이 반영된 사례다.
처음부터 서로의 입장과 한계 알고 만나야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정부 출연금과 민간 투자금 간 환상의 조합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서로의 입장과 한계를 잘 알고 만나야 한다. 출연연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의 세금을 재원으로 탄생한 출연연의 연구결과들이 치열한 사업화 과정을 견뎌내고 성공해 국가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