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반도체 대미 투자 냉철한 판단을
세계 반도체산업은 지난 70여 년간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해왔다. 1950년대 말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 개발에 성공한 미국은 이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해왔다.
그 비결은 두가지였다. 첫째, 자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경쟁국을 철저히 견제해 성장을 억눌렀다. 둘째, 반도체 가치사슬에서 고부가가치가 창출되는 연구개발과 설계 분야에 집중 투자해 제조 공장을 보유하지 않고도 막대한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러한 전략의 유효성이 약화되면서 미국 반도체 정책은 혼선을 거듭하고 있다. 이는 곧 세계 반도체시장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 반도체 시장 불확실성과 불안정성 높아져
1980년대 중반 일본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을 제치고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조선 자동차에 이어 반도체까지 압도적인 경쟁력을 보이자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급격히 확대됐다. 이에 미국은 슈퍼 301조를 발동하고 미일 반도체협정을 체결해 일본의 반도체 수출을 제한했다. 결국 일본 반도체 제조업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반도체 가치사슬 체제가 자리잡았다.
이후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중국은 전자산업 전반에서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2009년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데 이어 2015년 ‘중국 제조 2025’를 통해 첨단산업 자립 전략을 공개했다.
이에 미국은 곧장 무역전쟁과 기술패권경쟁을 본격화했지만 일본과 달리 중국은 자국 내 거대한 내수시장과 자립적 산업생태계를 바탕으로 여전히 반도체 제조 역량을 키우고 있다. 일본과 중국의 대비는 경제자립도가 패권경쟁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일반 제조업 가치사슬에서는 흔히 ‘스마일 곡선’이 적용된다. 연구개발·설계, 마케팅 단계에서 부가가치가 높고 제조 단계는 낮은 구도다. 반도체산업도 비슷했으나 마케팅 부문 비중이 낮아 미국 기업들은 설계와 연구개발에 집중해 엔비디아 퀄컴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을 키워냈다. 코로나19 이전까지 이러한 미국의 전략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글로벌 반도체 부족 현상이 발생하자 제조공장 부재가 경제·안보에 위협하는 약점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반도체 제조기술의 첨단화가 진행됨에 따라 대만의 TSMC와 같이 반도체 제조만을 하는 기업의 수익성이 매우 높아졌다. 반도체산업의 스마일 곡선의 구조가 달라진 것이다. 이에 미국정부가 서둘러 반도체 제조공장을 미국에 건설하고자 했으나 기술과 자금 면에서 경쟁력을 모두 갖춘 자국 기업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미국은 2022년 ‘반도체특별법(CHIPS and Science Act)’을 제정해 자국 내 생산기지 유치를 추진했다. 동맹국을 끌어들여 공급망과 프랜드쇼어링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이 반도체법을 부정하고 반도체 품목별 관세 부과를 연일 언급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산업 정책이 일관성을 잃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술 자립과 산업 경쟁력 강화 최우선 과제로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 시장 확대를 위해 현지투자 자체를 무조건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압박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진행하는 투자는 장기적으로 한국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세계 반도체 패권경쟁은 과거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불확실하다. 우리 정부와 기업은 감정적 대응이나 단기 성과에 매달리지 말고 냉철한 전략적 판단을 통해 기술자립과 산업경쟁력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