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정보통신 강국’ 허울 뒤에 숨은 태만

2025-10-10 13:00:01 게재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지난 4월 SK텔레콤 서버가 해킹 공격을 받고 2700만건 가까운 고객 유심정보가 유출되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어 6월에는 KT에서 불법 초소형 기지국을 이용한 소액결제 침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362명이 2억4000만원 가량의 피해를 당했다. 또 불법 기지국을 통해 5000여명의 가입자 식별정보(IMSI)가 유출된 정황이 드러났다. 2023년 1월에는 LG유플러스의 고객 약 30만명의 개인정보가 해킹으로 새나간 적이 있다. 결국 대형 이동통신 3사가 모두 해킹과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겪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롯데카드에서는 297만명의 회원 정보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피해자는 960만명 회원의 약 1/3에 이른다. 이처럼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업종을 가리지 않고 물의를 일으킨다. 고객들의 정보를 소중히 다룰 줄도 모르고 의지도 없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대형 이동통신 3사 모두 해킹과 개인정보 유출 사건 벌어져

정부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26일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 본원에서 발생한 화재 역시 ‘기본’을 소홀히해서 빚어진 인재라고 할 수 있다. 화재는 12시간 넘게 계속되고 1등급 40개를 포함해 모두 707개의 정부 행정정보시스템이 마비됐다고 한다. 특히 중앙행정기관(부처) 공무원 업무용 자료 저장소인 ‘G드라이브’가 완전히 타버렸다. 이 때문에 74개 기관, 19만여명의 국가공무원이 개별적으로 저장해둔 업무자료가 모두 소실됐다.

지난 2022년 카카오톡이 일시 마비됐을 때 백업 시스템이 없었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다. 카카오톡이 또하나의 기간 통신망 같은 것이어서 정부는 방치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나마 카카오톡 등 빅테크기업에게 시스템 2중화를 의무로 부과했다. 그러나 정작 정부는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정부의 국정자원에는 백업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정부가 민간에게 요구하기 이전에 스스로 앞장서고 스스로 엄격해야 한다는 동서고금의 원칙을 외면한 결과다.

더욱이 국정자원이 관리하는 정부 시스템은 이미 여러 차례 외부로부터 해킹 시도를 당하기도 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이 행정안전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20년부터 올해 6월까지 5년 6개월간 국정자원이 관리하는 52개 중앙부처 시스템 5300여개에서 63만건 이상의 해킹 시도가 벌어졌다. 해마다 10만건 가량의 해킹 위협이 저질러진 셈이다.

이렇게 해킹 위협이 잦으면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확실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사안일주의와 태만함이 습관화돼 있었던 탓이다. 그러니 이번 같은 큰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태만함이 ‘정보통신 선진국’이라는 허울 뒤에 숨어 있었다.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도 지난 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현안질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압축성장기에 너무 빨리 정보화사회로 넘어오면서 충분한 시설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전자정부 세계 1위라는 타이틀에 도취한 면이 있다”고 밝혔다. 그런 도취 때문에 낡은 설비를 개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정자원의 이재용 원장 역시 과거 소방당국의 화재안전 조사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 “적절하지 못한 조치였다”며 잘못을 인정했다. 뒤늦게나마 그런 진솔한 고백이 나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한국은 정보통신 기자재 생산과 보급에서는 분명히 ‘선진국’이다. 그러나 이를 책임있게 운영하는 정신은 여전히 후진적이다. 대충 하고 넘기는 ‘날림주의’가 넘친다. 아마도 기업과 정부의 봐주기나 이권유착도 한몫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건설공사에서는 이런 날림주의 때문에 부실공사가 자주 발생하고 노동자 사망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런 날림공사가 건설현장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한국 사회 곳곳을 좀먹고 있음이 잇단 정보통신 재난사태에서 드러났다.

정부도 대기업도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사고혁신 필요

국정자원 화재로 망가진 정부전산망 복구작업은 아직 27% 안팎에 머물러 있다. 윤호중 장관은 국회 답변에서 ‘재난복구(DR) 시스템’ 등 2중화 조치를 조속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이기는 하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태만과 ‘날림주의’를 뿌리뽑지 않으면 안된다. 설비가 아무리 좋아도 올곧고 반듯한 책임의식이 없으면 사고는 언제든 재발한다. 정부도 대기업도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사고혁신이 필요하다.

차기태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