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과학기술 미래를 여는 18번째 낙타

2025-10-21 13:00:10 게재

탈무드에는 17마리의 낙타를 나누지 못해 고민하던 세 아들에게 현자가 자신의 낙타 한 마리를 더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18번째 낙타’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의 한미 간 통상 협상도 이와 비슷하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산업·통상질서를 강화하며 3500억달러 규모의 직접투자를 요구하고 있지만 협상은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난관을 풀 ‘18번째 낙타’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돈이 아니라 과학기술이다. 한국은 단순한 투자 파트너가 아니라 세계적 수준의 기술역량을 갖춘 국가다. 반도체 인공지능(AI) 양자 6G 소형모듈원자로(SMR) 로봇 등 첨단 분야의 경쟁력은 단기적 자본보다 훨씬 지속가능한 자산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한미 협상에서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넘어 상호 이익을 실현하는 전략적 자산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과학기술협력 축으로 자국 우선주의 벽 넘어야

지금 국제정세는 기술패권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미국은 리쇼어링과 공급망 통제를 강화하며 자국 중심의 산업생태계를 구축하고, 중국은 AI·양자·반도체·로봇 등 전략기술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양국의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동맹국들 역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새로운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단순한 공급망 파트너가 아니라, 기술혁신을 통해 미국의 산업 경쟁력과 안보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전략적 동반자다.

과학기술 협력을 축으로 자국 우선주의의 벽을 넘어 보다 안정적인 공급망을 함께 구축할 수 있다. 전략기술의 가치는 민간과 국방을 동시에 뒷받침하는 이중용도(Dual Use)에 있다. 반도체와 AI는 4차산업혁명의 핵심이자 차세대 무기체계의 기반 기술이며, 6G와 로봇은 민생과 안보를 함께 지탱한다.

한국의 과학기술 역량이 미국의 산업 및 안보 생태계와 연계될 때 한미동맹은 경제협력을 넘어 기술안보동맹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는 자국 중심으로 기울어가는 미국의 산업정책에 대응하면서도, 미래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실질적 협력의 틀이다. 미 해군의 군수자산 확보와 직결되며, 물류·에너지 공급망 안정에도 기여하는 조선업 협력(MASGA)이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변화의 기반은 국내에서도 강화되고 있다. 정부는 2026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을 AI 등 전략기술 중심으로 35조3000억원까지 확대하며 역대 최대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기로 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임무 중심 대형화와 연구과제중심제도(PBS, Project Based System) 폐지는 연구자들이 장기적 안목에서 국가 전략기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특히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부총리급 승격은 단순한 정부조직 개편이 아니라 연구개발–기술산업화–과학외교를 연결하는 전략 컨트롤타워 구축의 출발점이다.

실험실의 연구가 산업현장과 외교무대로 확장될 때 그것은 곧 국익을 지키는 힘이 된다. 한국은 이미 일본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수출규제 당시 산·학·연·관 협력을 통해 핵심 소재의 내재화를 이뤄내며 위기를 기술혁신으로 돌파한 경험이 있다. 이번 협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단기적 이해득실에 얽매인 관세나 투자 공방을 넘어 기술을 기반으로 한 장기적 협력구조를 세워야 한다. 미국이 자국 중심의 공급망을 고집하더라도 한국의 기술력은 함께 성장할 여지를 넓혀 줄 18번째 낙타가 될 것이다.

한미동맹을 안보 넘어 기술기반 동맹으로 격상

과학기술은 미래협력을 설계할 핵심 카드이며, 이를 지렛대 삼아 한미동맹은 안보를 넘어 기술 기반의 동맹으로 격상될 수 있다. 대폭 증액된 R&D 예산, 출연연 역할 재정립, 부총리급 과기정통부 체제는 이를 뒷받침하는 든든한 기반이다. 과학기술로 새로운 협력 구도를 만들고, 한미동맹을 미래형으로 발전시키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난관을 현명하게 푸는 길이다.

김성수 연세대 특임교수 전 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