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고조되는 산업 공동화 우려

2025-11-06 13:00:01 게재

국내 제조업 공동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당초 미국과의 관세협상에서 대미투자금 3500억달러 중 5% 안에서 현금 투자를 하고 나머지 대부분을 보증으로 채우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 측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절반이 넘는 20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하기로 했다. 그 대신 200억달러의 연간 투자 상한선을 두기로 해 외환유출 부담을 크게 줄었다.

이 같은 합의에 따라 한국 자동차는 일본 EU(유럽연합)와 같은 15%의 관세로, 반도체는 대만과 동일한 수준의 관세로 미국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그간 대미 수출이 무관세로 이뤄졌던 것과 비교할 때 다소 불리해졌다.

대미 투자액, 한국 제조업 전체 설비투자액의 3배

연간 투자 상한선 200억달러는 4200억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의 이자수익(연 110억~150억 달러 추정) 등으로 감당할 수 있어 국내 외환시장에 미칠 직접적 충격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는 달러 공급 축소 요인으로 작용, 정부 재정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미국 내 대규모 공장 건설은 기업들의 국내 투자를 그만큼 줄여 국내 제조업 기반이 약화되고 나아가 고용감소와 인재유출, 지역경제 침체로 이어질 공산이 매우 높다.

특히 대미 총 투자액 3500억달러(약 500조원)는 지난해 한국 제조업 전체 설비투자액 145조원의 3배가 넘는 규모다. 한국은행의 투자 고용유발계수(10억원당 7.2명)를 적용할 경우 대략 350만개의 일자리가 미국으로 넘어간다는 얘기다. 물론 미국의 인건비가 한국보다 훨씬 높고 제조비도 많이 들 것이지만 대미 투자가 성공해 국익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세계 각국은 거세지는 보호무역주의 파고 속에 자국의 제조업 육성을 위해 해외기업 유치와 자국기업의 ‘리쇼어링’(국내 복귀)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국은 대규모 보조금을 지원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칩스법) 등을 앞세워 2021년에만 유턴기업이 1800개를 넘었다. 일본도 매년 600여개 기업이 유턴했다.

그러나 한국은 ‘유턴기업 지원법’이 시행된 2014년부터 올해 9월까지 10여년 동안 한국에 정착한 유턴기업이 고작 68개에 불과했다. 유턴기업은 해마다 감소해 올 상반기엔 5곳에 그쳤다. 하지만 이 기간 중 직접투자를 통해 해외로 진출한 국내 기업은 2437곳으로 1년 전보다 63% 넘게 급증했다.

국내 기업들의 이 같은 탈(脫)한국 선호현상은 노동생산성 둔화로 인한 자본수익률 저하로 글로벌 분산 생산 전략이 기업경영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외국이 제공하는 인센티브 영향도 컸지만 경직된 노동시장과 겹겹이 쌓인 규제 등 녹록지 않은 국내 경영환경과 중국 시장의 불확실성도 해외 진출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이는 국내 경제활력 저하로 이어져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고조시키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제조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네트워크 의존도가 높아 산업의 중심이 해외로 이동하면서 일자리 감소와 함께 기술력과 지역경제 등이 연쇄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그 결과 산업벨트가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 관세압박까지 더해져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주력업종이 일제히 현지화 전략을 강화하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포스코홀딩스 현대제철 등 대표기업들이 줄줄이 미국행을 예고하고 있다. 가뜩이나 양질의 일자리 부족으로 일도 구직 활동도 하지 않고 ‘그냥 쉰’ 청년이 40만명을 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높은 인건비와 땅값, 노란우산법 등 정부 규제, 크게 높아진 산업용 전기요금 부담 등으로 해외로 빠져나가는 기업들도 봇물을 이룰 것으로 예측된다. 산업용 전기료는 KWH(킬로와트시)당 185.5원으로 2021년에 비해 70%나 올랐다.

제조업 못 지키면 민생회복도 지역균형발전도 물거품

국제 무역질서는 ‘미국 우선주의’ 등장으로 지난 80년간 이어져 온 자유무역과 다자주의가 보호주의로 대체되는 대전환기를 맞았다. 이에 따라 통상·산업전략을 재설계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정부는 무엇보다도 국내 산업 기반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제조업 공동화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매진해야 한다. 일자리의 근간인 제조업을 지키지 못하면 민생회복도, 지역 균형발전도 물거품이 된다.

박현채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