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관세협상 이후, 기업이 답할 차례
대규모 미국투자 청구서는 우리 기업들에게 또다른 숙제를 안겼다. 기업들은 한해 200억달러를 투자하면서 한국기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됐지만 국내투자 감소와 산업공동화, 일자리 감소 등의 우려를 줄이는 적극적 주체로 나서야 할 과제도 남겼다.
한국정부의 미국과 관세협상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선방했다는 의견이 다수다. 경제단체들은 성명을 내고 환영한다는 반응을 냈다. 현대차그룹은 “헌신적으로 노력해 주신 정부에 감사드린다”며 공식입장을 내기도 냈다.
관세협상 큰 틀만 알려지다보니 세부 투자내용과 자본조달 방식 등을 어떻게 할지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진보정당과 참여연대는 각각 성명을 내고 ‘국내 투자 위축’과 ‘산업생태계 붕괴 위험’에 이어 ‘일자리 감소와 장기침체’ 위험이 커졌다고 경고했다.
3분기 설비투자 회복, GDP 성장세 뒷받침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연간 200억달러(약 28조원)의 대미투자 규모는 지난해 제조업 설비투자 전년대비 증가분(10조3510억원)의 약 3배에 달하는 규모다. 지난해 반도체 자동차 이차전지 조선 등 10대 제조업의 투자 실적은 114조원을 기록했다. 10대 제조업 투자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4%, 모든 산업 설비투자의 42%를 차지하는 수준이다. 올해는 10대 제조업 투자계획이 119조원으로 7% 증가한 수준으로 추정됐다. 이같이 설비투자가 회복되면서 국내총생산(GDP) 성장세를 뒷받침했다. 3분기 GDP 속보치에서 설비투자는 전기 대비 2.4% 증가했다. 성장률 기여도는 0.2%p다.
그런만큼 200억달러 대미 투자 규모는 우리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국내투자 규모는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만큼 국내총생산 기여도도 감소할 것이다. 해외투자와 거시경제 관계를 분석한 한국개발연구원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생산성이 0.1% 하락한 경우 국내 자본이 0.15% 감소하고 순대외자산은 같은 규모로 증가했다. GDP는 생산성 둔화 영향에 국내자본 감소영향이 더해져 모두 0.15%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 주요기업들은 10년전부터 미국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렸다. 10대그룹의 해외 생산법인 자산규모 변화는 우리기업의 해외투자 방향을 알 수 있다. 2016년 10대그룹의 해외 생산법인 자산이 가장 많은 나라는 중국(91조7595억원, 43.9%)이었다. 2024년에는 미국(157조7263억원, 32.1%)으로 바뀌었다. 2016년 1위였던 중국은 2024년 2위로 떨어졌고 미국은 3위에서 1위로 올랐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한 2017년 이후 국내 10대그룹이 글로벌 생산기지 중심을 중국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급격히 옮겼음을 보여준다. 미국 내 자국우선주의 보호무역주의 심화로 국내 10대그룹의 미국 내 생산법인 자산이 8년 새 7배 이상 급증한 셈이다. 10대그룹의 해외 생산법인 자산 규모는 2016년 말 209조원에서 2024년 말 490조원으로 8년 만에 281조원이 급증했다. 해외 생산라인에 대한 투자가 크게 늘었음을 말해준다. 10대그룹은 미국투자를 늘리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자국우선주의 정책에 대응해 왔다. 하지만 일본기업들과 비교해 보면 부족하다.
자동차를 보면 현대차·기아와 미국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일본 도요타는 미국시장 판매 대수는 233만대인데 미국 현지공장 생산 대수는 127만대다. 현지공장 생산비중이 55%인 셈이다. 혼다도 142만대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는 데 미국 현지공장 생산 대수는 120만대로 80%에 달한다.
반면 현대차그룹은 미국시장 판매 대수가 171만대이며 현지공장 생산 대수는 80만대로 비중은 47%에 불과하다. 현대차·기아 자동차가 도요타나 혼다보다 미국 관세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얘기다. 관세 50%를 맞고 있는 철강부문도 비슷하다. 일본 신일본제철은 유에스(US)스틸 인수로 현지 생산라인을 확보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미국에 가공공장만 있다.
미국투자 국내산업과 보완관계 있는 사업부터
이번 관세협상에서 한국 정부와 기업은 매년 미국에 최대 200억달러를 투자하면서 원리금이 보존되는 ‘상업적 합리성’이 있는 프로젝트(사업)만 추진하기로 합의한 대목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국내산업 공동화와 일자리 감소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 기업은 미국 투자가 국내산업과 보완관계에 있는 사업인지 따져야 한다. 국내산업에 가장 연관이 많은 프로젝트에 투자를 우선해야 한다. 미국투자가 국내산업 생태계를 원활하게 유지하고 풍부하게 하는지를 고려해서 투자사업을 결정하는 게 기업의 역할일 것이다.
범현주 산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