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유연성’에 대한민국 앞날 달렸다
민주노총이 제기한 ‘새벽배송 금지’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논쟁은 민주노총 산하 택배노조가 “야간노동은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가 규정한 발암 요인”이라며 “오전 0시부터 5시까지 배송을 제한하자”고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사회적 대화기구의 의제로 올려놓았는데, 의외의 곳에서 역풍을 맞았다. ‘보호대상’ 당사자인 심야택배노동자(기사)들이 “생계를 위협하는 주장”이라며 반발하고 있어서다.
새벽배송 1위업체인 쿠팡의 택배기사단체는 반대성명서를 낸 데 이어 “새벽배송 기사 204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93%가 배송제한 조치에 반대했다”는 내용도 공개했다. 심야택배기사는 낮부터 밤까지 일하는 게 아니라 낮에는 쉬고 야간에만 일해 시간활용이 가능한 데다, 배송업무 특성상 밤에 일하는 게 훨씬 편하고 수익도 좋다는 등의 반대이유도 제시했다. 낮에는 교통체증과 엘리베이터 사용의 어려움 등으로 피로도가 높은데 야간 배송은 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야간 노동을 무작정 과로로 취급하는 발상 자체가 잘못”이라는 지적도 했다.
‘새벽배송 금지’ 논란 흑백 2분법에 갖힌 우리 사회에 시사점 던져
전날 주문한 물품을 다음날 아침에 배달받게 해주는 새벽배송은 장 볼 시간이 부족한 맞벌이부부와 교통약자 등의 호응 속에 2000여만명이 이용하는 필수 생활재로 자리 잡았다. 2018년 5000억원에 불과했던 시장규모가 올해 15조원으로 급성장했고, 1만9000명의 일자리가 창출됐다. 전문가들은 이런 점을 들어 반대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더 중요하게 귀 기울여야 할 게 새벽배송업무 당사자들의 얘기다.
‘새벽배송 금지’를 둘러싼 논란은 많은 분야에서 ‘흑 아니면 백’의 2분법 논리에 갇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여러가지 변수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갈수록 복잡다단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어느 한쪽의 사실만을 갖고 “우리 주장만이 옳다”는 식의 강변이 너무도 쉽게 펼쳐지고, 또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업종 및 개별 노동자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무조건 주당 52시간을 넘겨 근무하지 못하도록 일률적으로 강제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독일 프랑스 일본 등 한국보다 법정 주당 근무시간이 적은 나라들이 많지만 사업장별로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여지를 열어놓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야당 대표시절 연구개발(R&D) 종사자들만이라도 주52시간제의 예외적용이 필요하다는 반도체업계와의 토론회에서 “고소득 근로자들이 동의할 경우 몰아서 일하는 게 왜 안되냐고 물으니 할 말이 없더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중국이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 드론 등 첨단산업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일하는 ‘996 근무’로 세계 최정상을 넘보게 되자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도 비슷한 제도를 앞 다퉈 도입하고 있다. 미국은 ‘노동절’을 탄생시켰을 정도로 노동자보호에 충실한 나라이지만 “더 일하겠다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는 ‘사적 자치의 원칙’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는 덕분에 기업들의 발빠른 대응이 가능하다.
유독 한국만 그렇지 않다. 오후 6시가 되면 연구원들도 ‘무조건 퇴근’에 따라야 해서 급한 프로젝트를 처리해야 하는 경우 회사 근처 카페에 노트북PC를 들고 가서 일하는 풍경이 흔하다. 노동당사자들이 형편껏 더 일하고 그만큼의 보상을 더 받고 싶다는 데도 ‘착취와 과로’의 틀에 가둬 금지하는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환경에서 제대로 된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국가 미래 걸린 정책 쾌도난마로 해치우려 해서는 곤란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여당은 법정 정년을 65세로 연장하는 법안을 ‘대통령선거 공약’이라는 이유로 연내에 확정짓기로 했다. 급속한 고령화시대에 퇴직 후 소득공백에 따른 ‘노년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측면이 있지만 정년연장은 청년일자리 잠식으로 이어진다. 근무연차에 따라 무조건 봉급이 올라가는 호봉제도로 인해 정년연장에 따른 기업들의 부담확대도 불가피하다.
한국보다 고령화를 먼저 경험한 일본은 이런 점들을 감안, 정년연장을 일률적으로 강제하지 않고 ‘퇴직 후 재고용’ 등 유연한 대안을 활용할 수 있게 길을 터줬다. 청년세대의 반발 등 풀어야 할 과제에 눈감은 채 국가의 미래가 걸린 정책을 쾌도난마로 해치우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