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금융포용이 만든 역설
최근 신용점수가 높을수록 금리가 낮다는 금융의 기본원리가 뒤집혔다. 지난 9월 신한은행 등 일부 시중은행에서 이러한 금리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정부의 금융포용 정책에 은행들이 호응하면서 초저신용자 대상 정책금융 상품의 가산금리를 대폭 낮춘 결과다.
여기에 더해 2024년 약 286만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신용사면이 단행됐고, 2025년에는 새도약기금을 통해 113만명의 16조4000억원 채무를 소각 또는 조정하고 있다. 금융 소외계층을 돕겠다는 좋은 의도다. 그러나 결과는 역설적이다. 금융포용을 강화할수록 신용시스템의 근간이 흔들리고 결국 저신용자의 금융 접근성은 더 나빠질 수 있다.
‘합리적 불성실의 함정’ 경제 전반으로 전이
역대 정부마다 출범 초에 신용사면을 반복해왔다. 최근 국회에 제출된 자료 분석에 따르면 2024년 신용사면을 받은 이들 중 33~35%가 1년여 만에 다시 연체에 빠졌다. 3명 중 1명이다. 신용점수가 상환능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증거다. 신호등을 믿을 수 없게 된 운전자들은 어떻게 할까? 신호를 무시하기 시작한다.
금융기관들도 이미 대응하고 있다. 일부 은행들은 신용대출 한도를 축소하고 담보 요구를 강화하고 있다. 신용점수를 믿을 수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이다. 연말로 갈수록 가계대출 총량 규제로 일반 신용대출 취급이 어려워지면서 은행들은 정책대출 중심으로 영업을 재편하고 있다. 결국 저신용자의 금융 접근성은 정책 의도와 정반대로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금융포용의 자기모순이다.
30%가 넘는 재연체율을 단순히 ‘채무자들이 무책임하다’로 해석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행동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주어진 인센티브 구조 안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현재 구조를 냉정하게 보자. 성실한 상환자는 정책 혜택에서 배제되고 때로는 더 높은 금리를 낸다. 연체했다가 사면받은 사람은 낮은 금리를 받고 심지어 새도약기금으로 채무를 대폭 감면받거나 소각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 행위자의 선택은 명확하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간 비일관성 문제가 여기서 발생한다. 정부는 ‘지금만 특별히’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학습한다. 지난 20여년 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신용사면이 반복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추론한다. ‘다음 정부도 또 해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지금 힘들게 빚을 갚을 이유가 있을까? 이것이 ‘합리적 불성실의 함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불합리한 유인구조가 가계의 담장을 넘어 경제 전반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기업 부문에서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말 3년 연속 이자도 못 갚는 한계기업 비중이 17.1%로 14년 만에 최악을 기록했다. 업종 내 한계기업이 10%포인트 늘면 정상기업의 매출 증가율은 2.04%, 영업이익률은 0.51% 떨어진다. 구조조정을 회피한 대가가 경제 전체의 활력 저하로 나타나고 있다. 가계 부문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금융과 복지 분리가 진정한 금융포용의 출발점
해법은 명확하다. 금융과 복지를 분리해야 한다. 저소득층을 돕고 싶다면 금융시스템에 복지기능을 떠넘기지 말고 재정으로 직접 지원해야 한다. 금융시스템은 위험에 기반한 차별적 가격결정이 핵심이다.
이를 유지하면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소득 기반 직접 지원과 함께 직업훈련 등 실질적 자립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용사면의 주기적 반복을 중단할 필요가 있다. 신용정보의 가치를 지키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금융포용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