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KIST에 거북선을 세운 뜻은
2026년, 한국 과학기술의 상징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개원 60주년을 맞는다. 과학기술 전담 부처가 생기기 1년 전인 1966년, 국가의 미래를 열 종합연구소를 세우겠다는 결정은 이후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 기술 역량 축적의 출발점이 됐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과학기술 기반의 경쟁력은 바로 그 첫 단추에서 비롯된 것이다.
KIST 본관 외형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모티브로 설계된 것으로 유명하다. 본관 옆에 작은 인공연못을 조성하고 뱃머리가 산을 향하도록 설계한 것은 거북이가 물에서 나와 육지로 나아가는 모습을 통해 새로운 출발인 ‘태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KIST가 국가 발전을 이끌 기술과 인재를 길러내는 ‘과학기술의 요람’이 되기를 바랐던 절박한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KIST 설립 때처럼 기술우위 확보가 살 길
그러나 KIST의 탄생은 상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본관 내부의 ‘존슨 강당’이 말해주듯, 강당 입구에 새겨진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의 부조는 월남전 파병이라는 냉혹한 국제정치 속에서 한국이 자립적 기술력을 확보해야 했던 역사적 배경을 상기시킨다. KIST가 한국의 월남 파병에 대한 미국의 대가로 설립된 사실은 ‘과학기술입국’이 처음부터 국가적 요청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자, 오늘날 기술주권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일깨운다.
흥미로운 점은 60년 전 KIST가 세워지던 시기와 지금의 상황이 놀라울 만큼 닮았다는 사실이다. 당시가 과학기술 기반을 갖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기였다면 지금 우리는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라는 또 다른 거센 파도를 마주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로봇 바이오 에너지 등 첨단 분야의 기술우위는 국가 경쟁력뿐 아니라 경제와 안보의 핵심이다. 이를 확보하지 못하면 산업경쟁력과 국가안보 모두 흔들릴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울돌목의 거센 물길을 활용해 난관을 돌파했듯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한된 자원 속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전략기술을 확보하는 일이다. 과기정통부가 제시한 ‘12대 국가전략기술’은 단순한 기술 목록이 아니라 기술패권 시대의 관문(Choke Point)을 확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는 울돌목에 도열했던‘12척의 배’에 비유할 수 있으며, KIST를 기점으로 성장해온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기술의 흐름을 읽고 전략적 길목을 선제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출연연을 둘러싼 연구과제중심제도(PBS, Project Based System) 개선 논의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PBS가 연구현장에서 큰 제약으로 작용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제도 폐지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출연연이 국가적 요구에 어떻게 부응하고, 국민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과 책임이다. PBS 폐지로 상징되는 정책 변화는 단순한 운영 방식의 개선이 아니라 출연연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 전환점이다.
출연연은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장기·도전적 연구를 수행하며 국민 세금으로 미래가치를 창출하는 국가의 두뇌다. 따라서 과제 수주 중심의 기존 관행을 넘어 각 기관이 스스로 설정한 임무를 어떻게 구현할지, 왜 그 기관이 필요한지를 결과로 증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율성이 넓어질수록 그 성과가 국민이 체감할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출연연이 지닌 역량과 잠재력은 충분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연구환경을 둘러싼 논쟁을 넘어 연구성과로 국가의 과학기술 기반을 공고히 하는 일이다. 이것이 출연연을 믿고 아끼는 한 사람으로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근본적인 존재 이유다.
‘사즉생’ 의지로 새로운 과학기술 혁신을
60년 전 거북선 뱃머리에 담긴 염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KIST 본관의 상징처럼 우리는 ‘과학기술 혁신의 씨앗’을 꾸준히 만들어내야 한다. 씨앗이 자랄 수 있는 생태계를 튼튼히 하고, 그 결실을 국민에게 돌려드리는 일, 이것이 과학기술계가 새해에 세워야 할 가장 중요한 다짐이다.
이순신 장군이 남긴 ‘사즉생(死卽生)’의 뜻을 되새기며, 2026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새로운 길을 힘차게 열어가자.